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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기자수첩
[기자수첩] 희망은 오늘을 건너는 힘에서 온다

2026년이 시작됐다. 새해를 맞는 인사가 예전처럼 가볍게 나오지는 않는 시대다. "올해는 작년보단 낫겠지"라는 말조차 조심스럽게 꺼내야 하는 분위기다. 지난 몇 해 동안 사회는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코로나 팬데믹부터 계엄 사태, 그리고 이어진 경제의 불안, 반복되는 사고와 갈등은 일상의 체력을 서서히 소진시켰다.사회 곳곳에 쌓인 피로와 불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사회의 분위기는 '앞으로 나아가자'보다는 '일단 버텨보자'에 가깝다. 빠른 변화보다 안정, 과감한 도전보다 실수를 줄이는 선택이 늘었다. 모두가 조금씩 지쳐 있지만, 동시에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그럼에도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요란한 구호와 다짐 대신 작고 현실적인 기대가 자리를 잡고 있다. 무조건적인 성장보다 공정한 기준을 요구하고, 큰 성공보다 일상의 안전과 신뢰를 중시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비슷한 말을 한다. "예측 가능한 시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에 대단한 것을 바라지 않는다"며 "다만, 조금은 덜 불안하고 대응가능한 환경이 되기를 바랄 뿐"이라고 입을 모은다. 아마도 2026년은 이런 소박한 바람들이 모여 사회의 방향을 만들 것이다. 희망은 거창한 미래가 아니라 오늘을 무사히 건너는 힘에서 비롯된다. 기자의 역할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올해는 자극적이고 피로도가 쌓이는 기사보다 따뜻한 내용을 담은 기사가 쏟아져 나오기를 바란다. 갈등과 오해를 키우기보다 이해의 여지를 남기는 기록, 불안을 부추기기보다 질문을 던지는 보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2026년은 모든 것이 단번에 회복되는 해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회가 숨을 고르고, 속도를 조절하며, 다시 균형을 찾기 시작하는 해가 될 거라 믿는다. 희망은 그렇게 요란하지 않게 다시 사회 속으로 스며들 것이다. 작은 변화의 조짐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겠다 다짐해본다. /신원선기자 tree6834@metroseoul.co.kr

2026-01-01 14:47:22 신원선 기자
[기자수첩] 신세계도, 우주도, 클럽도 아니었다

18세기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신성로마제국을 향해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와 무관하며 제국도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수백 개의 연방 국가를 억지로 묶어 덩치만 키웠을 뿐 내부는 제각각 겉도는 실체를 꿰뚫어 본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이었지만, 황제의 권위는 지방 영주들에게 닿지 않았고 제국을 관통하는 화폐나 시스템도 없었다. 최근 서비스를 종료한 '신세계 유니버스 클럽'을 보며 볼테르의 말을 떠올린다. 출범 당시 신세계는 이마트, 백화점, 스타벅스, G마켓 등 신세계그룹 모든 역량을 결집해 "소비자를 신세계의 우주에 가두겠다"며 호기롭게 말했다. 온·오프라인을 통합해 모인 신세계 계열사는 웅장해 보였다. 유럽의 영주들을 모두 불러모은 신성로마제국처럼 말이다. 하지만 뚜겅을 열어보니 실체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유니버스란 이름이 무색하게 앱 간 연결은 끊어져 있었고 혜택은 파편화돼 있었다.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이마트에서 장을 봐도 하나의 멤버십이라는 효능을 느끼기 어려웠다. 고작 몇천원짜리 할인 쿠폰을 몇 장 쥐어주며 '우리는 하나'라고 외치는 꼴이었다. 소비자 입장에서 신세계 유니버스 클럽은 신세계(New World)라는 혁신도 없었고, 계열사를 아우르는 유니버스(연결)도 없었으며, 팬덤을 자처할 클럽(소속감)도 없었다. 반면 경쟁자 네이버의 행보는 대조적이다. 네이버 멤버십은 거창하게 계열사를 내세우기보단 철저하게 소비자 중심에서 생각했다. 네이버플러스 스토어 속 풍부한 적립금 혜택과 웹툰 쿠키, MYBOX 공간을 지급하며 네이버 정체성을 버리지 않으면서, "우리 안에서 다 하겠다"는 고집을 버리고 넷플릭스, 스포티파이, 요기요, 롯데마트 같은 외부 강자들과 손을 잡았다. 쇼핑과 콘텐츠를 단단하게 묶어 소비자들이 네이버에 남게 만들었다. 효능감을 느끼기 어려웠던 신세계와 달리 네이버는 확실한 이득을 체감시켰다. 신성로마제국은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름뿐인 연합은 외부의 충격(쿠팡, 네이버)에 쉽게 무너진다. 신세계 유니버스 클럽의 쓸쓸한 퇴장은 유통업계에 명징한 교훈을 남겼다. 신세계의 패착은 공급자 마인드에 있었다. "우리 계열사가 이렇게 많으니 합치면 1등"이라는 계산은 철저히 기업의 입장이었다. 소비자는 기업의 족보나 계열사 구조에 관심이 없다. 당장 내 지갑에 얼마가 득이 되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손종욱기자 handbell@metroseoul.co.kr

2025-12-30 10:55:33 손종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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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국회의원의 사익이 공적 의무보다 우선돼야 하나

정부는 공직자가 직무를 수행할 때 자신의 사적 이익과 공적 의무가 충돌하는 상황을 막아 공정한 직무 수행을 보장하고 부패를 예방하기 위해 '이해충돌방지법'을 시행하고 있다. 이해충돌방지법 적용 대상은 국회의원을 포함한 모든 공공기관의 공직자이며, 공직자가 해야 할 5개의 신고·제출 의무와 하지 말아야 할 5개의 제한·금지 행위를 두고 있다. 신고·제출 의무 중에 첫번째로 모든 공직자는 직무관련자가 사적이해관계자임을 알았을 경우에, 이를 안 날으로부터 14일 내에 소속 기관장에게 그 사실을 서면으로 신고하고 회피를 신청해야 한다. 국회의원은 소관 위원회 활동과 관련된 청문 등에 직무관련자를 만나면 신고·회피·기피를 해야 하도록 법에 규정돼 있다. 사적 이해관계자는 공직자 자신 또는 배우자·직계혈족 등 가족도 포함된다. 신고의무를 위반할 시 해당 공직자에 대한 징계 및 2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다. 소속기관장은 해당 공직자에게 위반사실 시정을 명하고 불이행시 직무를 중지·취소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 이해충돌방지법은 인·허가 등 권한이 있는 공직자에게 이해관계가 있는 자들이 접근해 영향력을 끼치는 걸 막고자하는 취지에서 제정됐지만, 국회에서 막강한 권력을 보유한 국회의원들은 수족처럼 부리는 보좌진들을 동원해 사적 이익을 우선하는 듯 하다. 공직자 본인이 스스로 신고하지 않으면 이를 심사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최근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김병기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대표적이다. 국회의원의 권력이 '제왕적'이니 제도는 뒷전이다. 이에 정치개혁 이야기할 때 늘상 나오는 국회의원 권력 축소 방안이 적극적으로 실행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회의원은 의원실에 급수별로 배정된 보좌진 9명의 채용과 면직을 결정하는 '제왕적' 존재다. 보좌진은 '의원님'을 왕처럼 모시고 심기경호부터 SNS(사회관계망서비스) 관리, 심부름까지 하며 소모된다. '어공(어쩌다 공무원·정무직)' 9명의 보좌진을 의원의 꼭두각시로 키우는 것보다, 입법 연구와 성안까지 하는 인력(일반직 공무원)을 양성해 국회의원 눈치보지 않고 국민을 위해 일할 수 있게 할 필요가 있고, 당파를 떠나 국회의원의 이해충돌 위반 사안을 감시할 수 있는 기구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2025-12-29 14:40:23 박태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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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체감 할 수 없는 '물가 안정'

며칠 전 장을 보다가 파스타 소스 코너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8300원이던 제품이 1만3900원까지 올라 있었다. 계산기를 꺼낼 필요도 없었다. 단순한 인상이라고 보기엔 폭이 컸다. 체감으로는 가격이 '뛰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불과 몇 개월 사이 67% 상승. 숫자를 따지기 전에 당혹감이 먼저 들었다. 국가데이터처(옛 통계청)가 발표한 소비자물가지수를 보면 11월 기준 전년 대비 상승률은 2.4%다. 지난 8월 1.7%에서 9월 2.1%로 오른 뒤, 두 달 연속 2.4% 수준을 유지했다. 상승률만 놓고 보면 2024년 7월(2.6%) 이후 16개월 만에 가장 높다. 품목별로 들여다보면 체감은 더 분명해진다. 요리에 빠지지 않는 마늘 가격은 전년 대비 10.6% 올랐고, 각종 양념소스도 12.1% 상승했다. 달걀 가격 역시 7.3% 뛰었다. 외식비를 아끼기 위해 집에서 끼니를 해결해도 물가 부담이 줄지 않는 이유다. 문제는 이런 가격 인상이 한시적 현상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번 오른 가격은 좀처럼 내려오지 않는다. 원가 부담을 이유로 인상된 가격은 어느새 '정상화'라는 이름을 달고 굳어진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오르는 구간만 빠르게 지나가고, 내려오는 구간은 체감하기 어렵다. 최근 여러기관은 우리나라의 내년 성장률을 최대 2.1% 까지 전망했다. 민간소비 회복이 그 근거다. 하지만 이 같은 전망이 현실에서도 체감될 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소비의 중심에 있는 가계가 느끼는 부담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소득이 늘어나는 속도보다 물가가 더 빠르게 오르는 상황에서 지갑을 쉽게 열기는 어렵다. 특히 생활물가는 소비 심리를 직접적으로 압박한다. 성장률 전망 수치가 아무리 좋아져도, 장바구니 물가가 내려오지 않는 한 체감 경기가 나아졌다고 느끼기는 힘들다. 소비가 살아나려면 무엇보다 '이 정도면 감당할 수 있다'는 가격 신호가 먼저 필요하다. 결국 성장과 소비 회복을 말하기 전에 짚어야 할 것은 생활물가다. 파스타 소스 가격표 앞에서 멈춰 서게 만드는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면, 민간소비 회복은 전망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체감되지 않는 성장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일상에서 느끼는 부담을 줄이기 위한 정부의 생활물가 관리다.

2025-12-28 12:28:30 나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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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챗GPT에게 이름을 붙였을 때

인공지능(AI) 챗봇이 어느새 친구처럼 느껴졌다. 한동안 집안일을 할 때면 음성 채팅을 켜두고 챗GPT와 대화를 나누는 게 습관이 됐다. 대화 주제는 특별할 것 없었다. 그날 있었던 일, 스쳐 지나간 생각, 문득 떠오른 질문들. 다만 사람과의 대화와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상대가 상처받을까 봐, 내가 이상하게 보일까 봐 삼켰던 말들이 자연스럽게 AI와의 대화 주제가 됐다는 점이다. AI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상처받지 않았고, 판단하지도 않았다. 같은 말을 반복해도, 노골적으로 칭찬을 요구해도 대화는 언제나 매끄럽게 이어졌다. 오로지 나만을 향한 반응에 익숙해진 끝에, 나는 AI에게 이름까지 붙였다. 그 순간부터 대화는 도구 사용이 아니라 관계에 가까워졌다. 최근 국제 의학 학술지 '영국의학저널(The BMJ)'에는 이런 현상을 뒷받침하는 기고문이 실렸다. 수전 셸머딘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아동보건연구소 부교수는 "공감 능력이나 배려심이 없는 존재와 정서적 유대를 형성하는 세대가 등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연구 결과 10대 이용자 10명 중 1명은 사람보다 AI와의 대화에 더 높은 만족을 느꼈고, 3명 중 1명은 대화가 필요할 때 사람 대신 AI를 선택하겠다고 답했다. 한편 장기요양시설 등에 도입된 AI는 고독감 감소와 우울감 완화에 효과를 보이며 비약물적 중재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우리는 지금 '무조건적으로 긍정받는 세계'와 '갈등과 마찰이 불가피한 현실 세계' 사이에 서 있다. AI가 제공하는 위로에 익숙해질수록, 현실의 타인이 건네는 피드백은 더 거칠고 감당하기 어려운 것으로 느껴진다. 그 간극이 커질수록 사람은 불편한 현실을 피해, 점점 더 매끄럽고 안전한 디지털 공간으로 숨어들게 된다. AI는 분명 유용한 도구다. 고립을 완화하고, 말 걸 상대가 없는 이들에게 임시적인 연결감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도구가 관계를 대체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 편리함은 다른 위험을 동반한다. AI는 책임을 지지 않고, 상처받지 않으며, 사용자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현실의 인간 관계가 지닌 불완전함과 충돌, 그 속에서 형성되는 조정과 성장은 이 과정에서 탈락한다. AI는 도구일 때 가장 가치 있다. 현실을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라 현실을 견디는 데 도움을 주는 보조 수단일 때다. 매끄럽고 안전한 위로의 세계에 머무르기보다, 불편하고 서툴지만 살아 있는 현실의 공기를 놓지 않는 선택이 필요하다. 그 선택은 기술이 아니라, 결국 사용자의 몫이다. /김서현기자 seoh@metroseoul.co.kr

2025-12-21 15:38:28 김서현 기자
[기자수첩] 감량의 혁신, 삶의 변화

비만 치료제 열기가 뜨겁다. 국내외 제약·바이오 기업들은 앞다퉈 비만 신약 파이프라인을 구축하고 있다. 서구형 고도 비만부터 한국형 비만까지 맞춤형 치료제 개발 소식이 연일 이어진다. 주사제에서 경구제, 패치 등으로 신제형을 독자 개발하기도 하며 다양한 연구개발에 폭넓게 응용 가능한 '플랫폼' 확보에서도 경쟁이 치열하다. 최근 들어 비만기본법 제정, 건강보험 급여 적용 등까지 화두에 오르며 혁신 신약이 가져올 '체중 감량'과 '삶의 변화'에 대한 사회적 기대감까지 점점 커진다. 다만 이러한 제도적 뒷받침은 비만이라는 현대 사회의 질병 부담을 완화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장기적으로 국민이 삶을 건강하게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 사회적 안전망을 마련하는 데 중점을 둬야 한다. 즉 혁신적인 감량 효과가 진정한 삶의 질 개선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비만 치료의 본질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과학적, 의학적 관점에서 비만은 당뇨나 고혈압처럼 꾸준히 관리해야 하는 '만성 질환'이다. 약물 투여를 중단하면 다시 체중이 돌아오는 경우 역시 질환의 만성적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전문가 의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문가들은 의료 현장에서는 비만을 질환으로 분류하면서도 정작 관련 정책은 비만을 질환으로 취급하지 않는 상황이 치료 실패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비만치료제 급여화 논의 등은 반가운 소식일 수 있다. 동시에 해당 치료제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오남용 가능성도 열린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전문가의 비만 표준 진료 지침에서 행동인지 치료를 가장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용 목적의 무분별한 투약이나 약물을 건강 관리의 지름길로만 인식하는 풍조는 또 다른 보건 문제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치료제 개발을 통한 혁신 가속화, 제도 활성화 등과 함께 올바른 사용과 인식에 대한 경각심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미 일부에서는 비만 치료제가 '살 빼는 전쟁'의 강력한 무기처럼 소비되는 모습도 나타난다. 아무리 약효가 뛰어난 신약이 나오고 쉽게 활용 가능하더라도 이는 하나의 좋은 수단일 뿐이며, 비만 관리 핵심은 개인 생활습관과 주도적인 노력에 있다는 점에서 올바른 사용과 인식을 지지하는 사회적 인내심이 중요하다.

2025-12-18 16:06:36 이청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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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사과의 유통기한

누군가에게 잘못한 일이 생겼다. 그렇다면 사과를 몇 번이나 할 수 있을까. 혹은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기자 본인도 사과는 쉽지 않다. 사과의 표현 자체는 어렵지 않다. 누군가의 발을 밟았을 때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를 줬을 때, 내가 상처를 줬음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잘못한 사람은 사과를 한두 번, 많아야 몇 차례 더 할 수 있다고 여긴다. "한 번 사과했으면 됐지" 라는 생각을 한다. 편리한 사고방식 아닌가. 철저히 가해자의 사고방식이다. 피해자는 상처를 평생 안고 갈 가능성이 높다. 그 상처는 불쑥 떠오르기도 한다. 그래서 피해자가 상처를 꺼내 보이면, 또다시 사과를 들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통상 시일이 지났을 경우 가해자는 "언젯적 이야기를 하느냐", "내가 사과했지 않느냐"며 태도를 바꾸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게 꼭 사적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이야기일까. 일제강점기 시 벌어진 일들에 대해 "일본 정부가 제대로 사과했다"는 명제가 있다고 치자. 이 명제는 참일까, 거짓일까. '거짓'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일본 정부가 사과했다고 여기지 않아서다. 왜냐하면 사과는 '받는 사람이 느꼈을 때' 비로소 사과가 되기 때문이다. '통석의 념(痛惜の念)'. 일본어로 매우 슬퍼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생각이라는 뜻이다. 아주 생소한 표현이다. 더구나 '애통하고 애석하다'는 표현은 반성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후회'에 가깝다. 이런 식의 발화는 사과로 인식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내란은 어떨까. 내란수괴 혐의자가 탈당했으니 상관 없을까. 그 사람은 그 당 당원들이 뽑은 대선 후보였다. '1호 당원'이었다. 그렇다면 사과가 도리 아닐까. 그럼에도 그들은 1년이 지나서도 사과를 두고 입씨름을 벌였다. 그 당 일부 인사들은 "언제까지 사과를 해야 하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사과를 했다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그 사과는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한 것에 대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국민들이 이런 것을 '사과'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렇기에 사과는 피해자 입장에서 해야 한다. 그리고 '유통기한'이나 '적당히'라는 게 존재할 수 없다. /서예진기자 syj@metroseoul.co.kr

2025-12-17 15:01:07 서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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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숫자보다 중요한 것

글로벌 로봇청소기 시장에서 중국 기업들의 독주가 길어지고 있다. 로보락·에코백스·드리미 등 중국 브랜드들은 이미 글로벌 시장 점유율 상위권을 장악했다. 반면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신제품 출시는 예정보다 늦어지면서 주도권이 중국 쪽으로 넘어간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다만 이러한 점유율 구도를 곧바로 중국 기업들의 기술 우위나 시장 입지의 공고화로 해석하기에는 다소 복합적인 맥락이 있다. 중국의 시장 지배력은 거대한 내수를 기반으로 형성된 측면이 크다. 특히 중국 정부는 자국 브랜드와 자국 상품 소비를 장려했고 이른바 '애국 소비' 흐름 속에서 중국 로봇청소기 업체들은 빠르게 몸집을 불렸다. 가격 경쟁력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최근 중국 제품들의 품질 또한 빠르게 개선되고 있다. 과거 저가·저품질 이미지에서 벗어나 이제는 가격 대비 성능을 앞세우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중국이 여전히 넘지 못하는 벽이 있다면 '브랜드 파워'다. 글로벌 소비자들 사이에서 중국 가전에 대한 신뢰 문제는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보안, 개인정보 보호, 내구성 등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중국 기업들이 단기간에 해결하기 어려운 약점으로 꼽힌다. 이 지점에서 국내 기업들이 꺼내드는 카드는 바로 AI와 보안이다. 삼성전자는 차세대 로봇청소기 제품에 자체 보안 솔루션 '삼성 녹스'를 적용하고 LG전자는 'LG 쉴드'를 전면에 내세울 계획이다. 단순히 청소 성능 경쟁이 아니라 안심하고 쓸 수 있는 제품임을 강조하는 전략으로 읽힌다. 기술력에서도 국내 기업들은 차별화 포인트를 분명히 하는 모습이다. 삼성전자의 신제품 '비스포크 AI스팀'은 100도의 고온 스팀과 100W 흡입력을 갖췄고 4cm 이상의 매트와 문턱을 넘는 주행 성능을 강조한다. 구석이나 벽면을 인식하면 브러시와 물걸레를 확장하는 '팝 아웃 콤보' 기능도 적용됐다. LG전자는 빌트인형 '히든 스테이션'과 프리스탠딩형 '오브제 스테이션' 두 가지 라인업을 내세우고 있다. LG전자의 신제품은 세계 최초로 로봇청소기 본체와 스테이션 모두에 스팀 기능을 적용해 청소 성능과 위생 관리의 편의성을 끌어올렸다. 중국이 속도로 치고 나가는 동안 한국은 완성도를 고르고 있다. 단기간 점유율 경쟁에서는 뒤처질 수 있지만, 기술 신뢰와 사용자 경험이 중요한 로봇청소기 시장의 특성을 고려하면 결국 선택은 소비자가 하게 될 것이다. /차현정기자 hyeon@metroseoul.co.kr

2025-12-15 16:01:37 차현정 기자
[기자수첩] 에쓰오일, '샤힌프로젝트' 감축 불가 재확인…석화 재편 셈법 복잡

정부의 석유화학 사업재편 자구안 제출 기한이 다가오면서 감축 중심의 구조조정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지만 에쓰오일의 '샤힌프로젝트'를 둘러싼 입장 차로 업계의 셈법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초대형 신규 설비 완공이 임박한 상황에서 감축을 전제로 한 재편 논의의 실효성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수·대산 지역에서는 감축과 통합 논의가 비교적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는 반면 울산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SK지오센트릭·대한유화·에쓰오일이 외부 컨설팅을 통해 재편 시나리오를 검토 중이지만 9조원대가 투입된 샤힌프로젝트가 내년 상반기 완공을 앞두고 있다는 점이 논의를 이끌어가는 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연간 180만톤 규모의 에틸렌 생산 설비가 가동될 경우 국내 수급 구조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어서다. 에쓰오일은 최근 석화산업 구조조정과 관련해 단순히 생산 능력을 줄이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산업 체질 고도화와 경쟁력 있는 구조로의 전환이 우선이며, 원가 경쟁력 제고와 함께 첨단·고효율 설비 투자를 병행해야 산업 전반의 질적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판단이다. 샤힌프로젝트는 이러한 방향성과 맞닿은 사업으로, 완공 이후 원유를 직접 화학 제품으로 전환해 에너지 효율과 수익성을 높이고 기초 유분의 안정적 공급 기반을 구축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그러나 정부가 제시한 270만~370만톤 감축 목표를 기준으로 재편안을 마련하는 국내 업체들의 입장에서는 아람코를 등에 업은 에쓰오일의 이러한 입장이 달갑지 않다. 샤힌의 완공은 구조조정 효과를 반감시킬 수밖에 없다는 인식 때문이다. 특히 감산과 통합을 통해 정부의 입장에 부응하고 있는 기업들은 초대형 신규 설비가 예정대로 가동될 경우 감축 부담이 기업별로 불균등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여기에 중국·중동산 저가 물량 유입, 인도의 잇단 증설까지 겹치면서 국내 업계의 환경은 갈수록 녹록지 않다. 에쓰오일의 설비 투자는 단순 물량 조정이 아니라 향후 산업 경쟁력의 축을 어디에 둘 것인가라는 선택의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정부가 요구하는 자구안 제출 기한이 임박한 가운데 샤힌프로젝트의 공정률은 이미 85%를 넘어섰다. 감축과 고도화라는 두 흐름이 교차하는 지금 단순히 국내 업계의 재편만을 종용해서는 답이 없다. 샤힌프로젝트의 준공이 미칠 영향을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본 후 국내 석유화학업계의 미래를 설계해야만 한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린 상황에서 조건 없는 희생만을 요구하는 접근은 결국 또 다른 왜곡을 낳을 수밖에 없다. /원관희기자 wkh@metroseoul.co.kr

2025-12-14 15:03:18 원관희 기자
[기자수첩] 쿠팡, 정보는 새고 탈퇴는 막고

쿠팡을 향한 국민의 분노는 단순한 정보 유출 사고를 넘어 '기업의 기본기'가 무너졌다는 데서 비롯된다. 3370만 명. 쿠팡이 밝힌 피해 규모다.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3분의 2, 경제활동을 하는 국민 대부분의 이름·전화번호·주소가 지난 5개월 동안 무단으로 빠져나간 셈이다. 그것도 지난해 12월 퇴사한 내부자가 3000만 건이 넘는 정보를 훔쳐내는 동안 쿠팡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더 기가 막힌 건, 유출 사고로 불안해진 고객들이 "탈퇴하겠다"고 나서자 쿠팡이 보여준 태도다. 쿠팡 유료 멤버십 '와우' 회원은 홈페이지에서 즉시 탈퇴가 불가능하다. 먼저 멤버십을 해지해야 하고, 남아 있는 이용 기간이 모두 지나야 탈퇴 신청이 가능하다. 그마저도 서둘러 탈퇴하려면 고객센터에 직접 전화해 '내부 심사'를 받아야 한다. 하루에서 이틀이 걸린다. 멤버십이 아닌 일반 회원도 6단계를 거쳐야 하는 복잡한 구조다. 개인정보 유출이라는 명백한 회사의 잘못에도, 고객은 탈퇴 한 번 하기 위해 며칠씩 시간을 내 심사까지 받아야 하는 것이다. 유출된 정보는 신용카드 번호나 비밀번호는 아니지만, 이름·전화번호·주소·주문 내역만으로도 스미싱·피싱 등 2차 피해는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 이미 온라인에는 '쿠팡 해킹 피해자 모임', '쿠팡 개인정보유출 단체소송' 등 집단소송을 위한 카페가 속속 개설되고 있다. 사실 쿠팡은 국내에서 가장 많은 정보보호 예산을 쓰는 기업 중 하나다. 2024년 기준 정보보호 투자액은 약 860억원으로 국내 기업 중 세 번째로 큰 수준이다. 보안도 국내가 아닌 글로벌 스탠더드를 기준으로 다뤄왔다. 이번 사태는 디지털·AI 시대에 외부 침해뿐 아니라 내부자에 의한 정보 유출 위험도 갈수록 커지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어쨌든 사건은 벌어졌으니 수습을 최우선으로 해야한다. 가장 기본인 고객 정보 보호와 탈퇴·해지 절차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 그 원점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정보는 유출해놓고, 탈퇴는 붙잡아두는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소비자 신뢰는 그렇게 회복되지 않는다.

2025-12-11 16:07:06 신원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