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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고객 맘고생시키지 않으려면, '만약의 만약'을 대비해야

얼마 전 지갑을 분실해 맘고생을 심하게 했다. 가장 먼저 '정부24' 홈페이지에 접속해 신분증 분실신고를 하려 했지만, 마땅한 인증 수단이 없어 첫 단계부터 막막했다. 가까스로 은행 앱을 통해 금융인증서를 발급받아 로그인에 성공한 뒤 '주민등록증 분실신고'를 완료할 수 있었다. 이어 '카드 분실신고'를 위해 카드사 대표번호로 연락했다. '카드 분실일괄신고 서비스'를 이용하려고 했는데, 카드사 직원이 그간 발급받은 카드의 이름을 전부 대라고 했다. 다 기억나지 않아 당장 떠오르는 카드만 분실 신고를 했다. 현재 보유 중인 카드 정보는 '계좌정보통합관리서비스' 누리집에서 알 수 있다고 해서 들어갔다. '카드정보조회'를 한 다음 나머지 카드에 대한 분실신고를 마쳤다. 이 사이트에서 '비대면 계좌개설 안심차단' 신청도 했다. 이후 금융감독원 누리집에 접속해 '개인정보노출'을 검색한 뒤 '개인정보노출자 사고예방시스템'에 등록 신청을 했다. 끝이 아니었다. 엠세이퍼 홈페이지에 들어가 '명의도용 방지 서비스'에도 가입해야 했다. 사이트에 접속하자 팝업창이 떴다. 이용자 급증으로 서비스 운영 시간이 조정된다는 내용이었다. SKT 해킹 피해자들이 몰려 홈페이지 접속 장애로 서비스가 중단됐다가 이뤄진 조치였다. 사건 직후 SK텔레콤 고객들은 명의도용 방지 서비스에 가입하고, 유심을 교체하거나 유심보호 서비스에 가입하는 등의 행동에 나섰지만, 불안감은 가시지 않고 있다.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 대처법은 '금융사기'와 '보이스피싱' 피해를 입었을 때 대응과 다르지 않다. 만약 소비자들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다면, 2500만 SK텔레콤 가입자 모두가 주민등록증분실신고, 카드 분실신고, 비대면 계좌개설 안심차단, 개인정보노출자 사고예방시스템 등록 등의 과정을 밟아야 할지도 모른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규모 해킹으로 인해 한 달 내 국민 절반이 불안을 겪을 줄 누가 예상했겠는가. 해킹 사태 이후 불안을 느낀 사람 중 일부는 위에 나온 대비책들을 선제적으로 마쳤을 수도 있다. 이제는 통신사뿐 아니라 개인정보를 보유한 모든 기업과 기관들이 '만약의 만약'을 끊임없이 상상하고 대비해야 한다. 때론 '사서 하는' 걱정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최소한의 방어가 되기도 한다.

2025-05-22 13:43:58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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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기로에 놓인 대부업계

대부업계가 생존 기로에 놓였다. 고금리 지속으로 신규 차주 발굴에 어려움을 겪은 탓에 수익성이 나빠졌다. 일부 국내 대부업체는 물 건너 동남아시아에 전당포를 차리는 한편 아예 간판을 내리는 대부업체도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전국 등록 대부업체는 8437곳이다. 연간 300여곳이 문을 닫은 결과다. 대부업체의 경기한파에 불법사금융이 난립한다. '대부업체=불법사금융'이란 꼬리표가 따라붙으면서 이미지 쇄신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 불법사금융이란 제도권 밖에서 금융업을 영위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업체는 금융당국이 정한 법정최고금리를 준수하는 정식 금융회사다. 은행권 대비 대출금리가 높지만, 유동성이 큰 자영업자나 저신용자에게는 필요한 기관이다. 올해 대통령선거 후보자들의 공약집을 살펴봤다. 소상공인과 서민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했다. 정책금융자금을 확대하거나 내수 활성화와 캐시백 등에 초점을 맞췄다. 서민금융기관의 자립과 영업환경을 조성하겠단 공약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저축은행이 중저신용차주를 위해 취급하는 햇살론이나 사잇돌도 결국 세금이다. 당장 시장에 자금을 풀면 팍팍한 살림살이가 나아지겠지만 지속가능 여부에는 물음표가 붙는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일이다. 향후 대부업체를 이용해야 하는 상황이 놓였을 때는 불법사금융이 최선의 선택지로 자리 잡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어떤 분야든 산업 기반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과거 필리핀은 세계 최대 규모의 쌀 생산 국가였다. 그러나 2000년대에 접어들어선 세계 최대 규모의 쌀 소비국가로 변모했다. 쌀값이 치솟자, 정부가 쌀 가격에 상한제를 도입하면서다. 농부의 소득이 감소하자 자연스럽게 농산업에 관한 공급과 투자가 감소했다. 덩달아 농경지 출신 도시 난민도 대거 발생했다. 세계 최대 곡창지대에서 쌀을 수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국내 대부업계가 과거 필리핀과 유사한 상황에 놓였다.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리면 갚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 저축은행보다 높은 금리를 적용하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소득수준이 낮아 신용이 떨어진 사람에겐 더 가혹한 대출이다. 그러나 당장의 곡소리를 피하고자 서민금융기관의 쇠락을 방치해선 안 된다. 대부업계 생존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져야 할 시기다.

2025-05-21 11:02:11 김정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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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비워진 교실, 남겨진 책임

수천 명의 유급생, 붕괴된 교육 일정, 엉킨 학년. '정원 확대'에 맞선 저항이 결국 의대 교육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자충수가 됐다. 올해 1학기에만 전국 의대생 8305명이 유급됐고, 제적도 46명에 달한다. 전체 재학생 1만9000여 명 중 절반가량이 사실상 수업에서 이탈한 셈이다. 항의는 거셌지만, 책임은 끝내 개인에게 돌아왔다. 그 여파는 내년에도 이어진다. 교육부는 예과 1학년 수업을 들어야 할 인원을 5500명에서 6100명으로 추산한다. 세 개 학번이 한 학년 강의에 몰리는 '트리플링' 현상이다. 교육부는 "예과는 교양 중심 수업이라 가능하다"는 입장이지만, 이미 일부 의대에서는 본과 수업을 예과로 내려보낼 만큼 여건이 빠듯하다. 강의실과 실습병원 확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의료계는 한목소리로 정부 책임을 지적한다. 의과대학 교수협의회는 "교육의 질 유지 없이 밀어붙인다"며 교육부를 비판했고, 대한의사협회는 "부당한 유급과 제적을 철회하라"며 국민감사청구까지 예고했다. 그러나 교육의 질과 학생 보호를 말하면서도 유급이라는 학사 원칙마저 정치화하는 태도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정당한 학사 평가 결과조차 '정부의 압박 때문''억울한 조처'라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교육기관과 전문가 집단의 태도인지 되묻게 된다. 유급은 교육을 포기한 대가이자, 그 자체로 제도적 책임이다. 아무리 명분 있는 문제 제기라 해도, 자신의 의무를 방기하고 그 대가마저 부정하는 태도는 납득하기 어렵다. 절반 넘는 동료가 교실에 없는 상황에서, 남은 학생들도 압박감 속에 등교하고 있다. 이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는 결국 학생들이다. 정원 확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합리적인 비판이 비생산적인 저항으로 흐르면 공적 신뢰는 무너진다. 의대생은 단지 '학생'이 아니라, 환자를 마주할 '미래의 의사'다. 공적 책임과 공동체 신뢰를 저버린 선택의 끝에 남은 유급 통계는, 과연 누구를 위한 싸움이었는지 돌아봐야 한다.

2025-05-20 15:32:24 이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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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2695만건이 사라진 사이, 책임도 사라졌다

정부가 SK텔레콤 유심(USIM) 정보 해킹 사태의 개인정보 유출 가능성을 공식화했다. 지난 1차 조사에서 "개인정보 유출은 없었다"고 발표했던 입장이 순식간에 뒤집혔다. 2년 전 심어진 'BPF도어'란 백도어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 조용히 2695만건의 유심 정보를 훔치고 있었다. 정부 1차 조사 당시만 해도 "개인정보 유출은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2차 조사에서는 이름·전화번호·생년월일·IMEI 등 민감정보가 담긴 임시저장 서버 2대까지 감염됐다는 정반대의 결론이 나왔다. 문제 없다더니? 악성코드가 설치된 시점은 2022년 6월. 로그가 남아있지 않은 기간이 1년 반에 달해 피해 범위는 오리무중이다. 조사단이 "기술적으로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수사는 진행 중이지만, 대중은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보다 '어디까지 당한 건지'를 먼저 묻고 있다. 이 가운데 피해 이용자들은 이번 사태를 두고 SK텔레콤에 냉정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개인정보가 유출됐는데도 계약 해지를 하면 위약금을 내야 하는가. 집단분쟁조정 신청이 이어지고, 법적인 해석도 갈리고 있다. 핵심은 이 해킹 사고가 'SK텔레콤의 귀책 사유'에 해당하느냐는 점이다. 일부 법조계는 유심 정보 유출이 보안 관리 실패에서 비롯된 만큼, 통신서비스 전체 책임 주체로서 SK텔레콤이 위약금 면제를 포함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또 다른 법조계 시각은 달랐다. "음성·데이터 등 본래 통신 기능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이유로, 약관상 면제 요건은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같은 사안을 놓고 '서비스의 범위'에 대한 해석이 극명히 갈린다. 2차 피해 가능성에 대해 정부는 "기술적으로 무력화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고, SK텔레콤도 "IMEI만으로 복제는 불가하다"고 선을 그었다. 모든 해명은 결국 사후 대응이다. 앞서 간단히 뒤집혔던 사실처럼 이번 입장도 어느 날 갑자기 조용히 뒤집힐지 모를 일이다. 이용자 입장에서 위약금은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니다. 통신망이 뚫렸는데 책임을 묻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디서부터 다시 믿어야 하는가. 6월 말까지 조사 완료가 목표다. 그 사이 우리 통신망 안에서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침입자가 또 다른 문을 두드릴지 모른다. /김서현기자 seoh@metroseoul.co.kr

2025-05-19 14:43:24 김서현 기자
[기자수첩] 감언이설의 ‘무능한 개혁’, 경제가 죽는다

더불어민주당이 밀어붙인 상법 개정안이 정부의 재의 요구권(거부권) 행사로 좌초됐다. 재계의 우려와 학계의 지적을 외면한 채 밀어붙여졌던 개정안은 겉으론 주주 보호와 투명경영을 위한 개혁처럼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선언적 문구와 모호한 규정뿐이다. 대표적 사례가 이사의 '충실의무' 조항이다. 이는 이미 판례와 실무에서 확립된 개념이다. 그런데도 굳이 법에 새로 넣은 건 정치적 제스처에 불과하다. 더 큰 문제는 명문화하면서도 그 기준이나 범위는 흐릿하게 남겨뒀다는 점이다. 분쟁의 소지만 늘었고 법적 해석의 통일성은 무너졌다. 재계는 오래전부터 미국식 충실의무 도입에 경계심을 보여왔다. 미국은 수백 년간의 판례와 제도로 기준을 쌓아왔지만, 우리는 그런 기반 없이 껍데기만 흉내 낸 것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겠다던 민주당이 오히려 자본을 내쫓을 법을 만든 셈이다. 전자주총 의무화 조항도 현실을 무시한 탁상행정이다. 대기업 기준으로 만든 전자시스템을 중소·코스닥 기업까지 강제하려는 발상은 실행 비용과 준비 상황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 '소액주주 보호'라는 명분만 요란할 뿐이다. 어릴 적 어른들은 '달콤한 말만 하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했다. 민주당의 상법 개정안도 그렇다. 주주 보호, 투명 경영, 책임 강화 등 말은 멀쩡하지만, 내용은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 설계도일 뿐이다. 말이 좋다고 좋은 법이 되는 건 아니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개혁은 혼란만 부른다. 이쯤 되면 궁금하다. 민주당은 과연 경제를 이해하고 있는가. 이재명 대표는 과거 "호텔 예약금 10만원이 지역을 돌고 돌아 경제를 살린다"고 말했다. 선의의 소비가 선순환을 만든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빚을 소비로 포장한 착시 속에서 재정은 망가지고 미래 세대는 빚더미에 오른다. 기본소득, 기본주택, 전 국민 25만원 민생지원금 등 이재명표 경제정책은 하나같이 국가가 모든 걸 책임지겠다는 재정 만능주의다. 하지만 그런 국가는 없다. 재정은 고갈되고 시장은 질식한다. 단기적 표는 얻을지 몰라도 경제를 망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법은 선언이 아니라 도구다. 정치는 구호가 아니라 책임이다. 실체 없는 개혁과 계산 없는 포퓰리즘이 활개치는 사이, 기업은 움츠러들고 자본은 한국을 떠난다. 책임지지 않는 정치가 경제까지 무너뜨리려 한다.

2025-05-18 10:17:54 김대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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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천상계의 법관들, 이제는 지상계로

과거 법관 탄핵에 대해 기자수첩을 쓴 적이 있다. 2021년 2월4일 헌정사상 최초로 국회에서 판사(임성근)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직후였다. 당시 쓴 기자수첩을 들춰보니, '사법부 권력이 어떠한 견제도 용납하지 않던 시대의 종말'이라는 문구가 보였다. 혹자는 '판사가 드디어 인간이 됐다'고 평가했다. 그간 대한민국에서 법관은 '천상계(天上界)'에 존재하던 이들로 여겨졌다. 직장인은 잘못하면 시말서를 쓴다. 입법부는 이미 '지상계(地上界)'의 인간으로 취급받은지 오래다. 행정부 수반은 입법부와 시민에 의해 파면시킨 사례가 벌써 두 차례다. 반면 사법부는 '사법농단 의혹'이 불거졌음에도 아무런 견제를 받지 않았다. 그렇기에 당시 판사 탄핵은 기자에게 나름 충격이었다. 그러나 '판사의 인간화'가 사법개혁으로 이어지지는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지금 기자가 뜬금없이 4년 전 기억을 꺼낸 건 최근 '사법부 불신' 현상이 심상찮아서다. 2025년 5월1일, 대법원은 유력 대권주자의 사건을 무죄에서 유죄로 바꾸고,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사회 통념상 '납득하기 어려운' 속도로 선고가 이뤄졌기에 졸속이라는 비판이 쇄도했다. 야권은 '적극적 견제책'을 꺼내든 반면, 보수진영은 '사법부 흔들기가 도를 넘었다'고 맞섰다. 문제는 4년 전과 달리, '사법부 흔들기'라는 주장은 먹히지 않고 있다. 오히려 사법개혁이 필요하다는 여론만 선명해졌다. 심지어 '천상계'의 존재인 판사들의 과거 판결과 신상이 거침없이 드러났다. 그들이 높은 법대에서 내려다보던 '지상계' 인간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여론지형이 달라진 건 '법관의 판결을 비판하는 건 불경하다'는 명제가 깨진 덕분이다. 사실 이 명제에 균열이 생긴 계기는 윤석열의 구속취소였다. 그런데 대법원은 시민들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꿨다. 이번 판결은 '주권자인 국민이 대통령을 선택할 권리를, 선출되지 않은 권력(사법부)이 빼앗을 수 있다'는 충격을 줬다. 그렇게 사법개혁은 더 이상 정치권의 공허한 구호가 아니라, 시민의 열망이 담긴 시대적 슬로건이 됐다. 이제 마음 속으로만 되뇌이던 질문을 던져본다. 법관도 사람이면 판결에도 편견이 개입할 수 있지 않냐고. '사람이 행한' 판결에 비판도 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헌정사 내내 '견제의 무풍지대'에 있던 사법부도, 이제는 지상계로 내려올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서예진기자 syj@metroseoul.co.kr

2025-05-14 12:41:34 서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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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사라진 성장 사다리

'벤처캐피털(VC)'이라면 흔히 떠오르는 이미지가 빠른 성장의 기술 스타트업이다. 인공지능(AI), 바이오, 플랫폼 등 유망 기술을 가진 초기 기업에 선별적으로 자금을 태워 성장시키고, 일정 시점에 수익을 회수하는 것이 전통적인 VC의 역할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이같은 방식은 한국 산업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기성 중소기업들에겐 남의 나라 얘기처럼 느껴진다. 창업 10년 이상, 제조·서비스 분야에서 현금흐름 기반으로 운영되는 전통 중소기업은 대부분 VC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다. 기술력이 있더라도 성장성 평가에서 '스타트업답지 않다'는 이유로 투자 대상에서 제외되는 일이 허다하다. 실제로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2024년 VC가 신규로 투자한 약 8조 원 중 대부분이 스타트업 또는 기술 기반 기업에 집중됐다. 창업 7년을 초과한 기업, 특히 제조 기반 중소기업에 대한 투자 비중은 5% 미만이다. 그나마 존재하는 몇몇 민간 투자기관이나 PEF도 대부분 M&A 또는 회수 목적의 전략에 치중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은 기성 중소기업 입장에서 성장 자금의 단절로 이어진다. 현금흐름은 있지만 R&D나 신사업 확대를 위한 자금을 확보하기 어렵고, 은행권 대출은 담보 중심이어서 한계가 분명하다. 더 큰 문제는 정책 자금과 민간 투자 간의 단절이다. 정부는 지원하는 자금과 보증 등은 단기 운전자금이나 생존 위주 자금이 많아 성장 자본으로 연결되기엔 한계가 있다. 민간 자본 시장의 역할이 필요한 배경이다. 물론 VC의 입장에서 보면 리스크 관리와 수익 회수를 고려했을 때 고성장 가능성이 불확실한 기성 중소기업에 대한 투자는 부담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VC가 스타트업만 바라보는 구조가 지속된다면, 한국 산업의 중간 허리는 영원히 약한 고리로 남을 수 있다. 특히 후계자 부재, 기술 전환 지체, 해외 진출 좌절 등 구조적 병목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막막한 상황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일부 정책형 VC나 산업특화형 펀드가 중소기업 대상 장기 투자 모델을 실험하는 시도는 의미가 있다.지역 기반 중소기업에 스케일업 자금을 공급하고, 장기 배당 수익을 회수하는 방식의 펀드들이 등장하고 있다. "스타트업만이 아닌 중소기업에도 투자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투자가 단기간 회수만을 목표로 한 '고속 성장 주식'만 좇는 구조로는 장기 산업 기반은 결코 다져지지 않는다. 스타트업과 중소기업 모두가 지속 성장 가능한 생태계로 나아가기 위해선, 사라진 '성장 사다리'를 다시 세우려는 투자 생태계의 구조 전환이 필요하다.

2025-05-13 15:49:01 최빛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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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알래스카LNG, 투자 앞에 선 물음표

한미 간 통상 협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사업에 한국 기업이 참여할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미국은 해당 사업에 한국 기업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해주길 기대하는 분위기지만 국내 산업계에서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알래스카 LNG 사업의 총투자 규모는 약 480억달러(약 68조원)에 달한다. 엑슨모빌 등 미국 에너지 대기업들도 한때 이 사업을 검토했지만 막대한 비용 부담 등을 이유로 참여를 철회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기업들이 본격적인 투자에 나서기 전 충분한 사업성 검토가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일각에서는 알래스카 LNG프로젝트가 수출 물량 확대와 함께 선박 발주 증가로 이어질 수 있어 조선업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기대감도 나왔다. 하지만 이를 조선업 전반에 대한 낙관적인 시나리오로 보기도 어렵다는 시선이 존재한다. 운송 구조 측면에서도 알래스카 LNG는 기존 미국 남부 지역에서 수출되는 LNG와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미국은 LNG 시장의 최대 수출국으로 자리잡으며 한국·일본·중국·대만 등 동아시아 주요 수요처까지 장거리 운송이 불가피했다. 이로 인해 선박 운항 시간이 길어지고 동일한 물량을 운송하는 데 더 많은 LNG선이 필요해 선박 수요 확대의 직접적인 요인이 돼왔다. 하지만 알래스카는 아시아와 비교적 가까운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다. 이로 인해 LNG 운송선박의 수요가 줄어들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높은 투자비와 낮은 수익성 우려가 공존하는 만큼 단순한 지리적 이점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민간 기업들의 입장도 복잡하다. 자체적으로 LNG를 직수입하는 기업들의 경우 수요가 선행되지 않으면 수입선 확대가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더욱이 LNG는 5~10년 단위 장기 계약이 일반적이기에 수요 변화 없이 공급처를 바꾸는 것도 현실적으로 부담이 크다. 정부는 알래스카LNG 프로젝트를 관세 협상의 카드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을 띄고 있지만 실제 참여 방식과 규모 결정에는 상당한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해당 프로젝트가 향후 실현 가능한 에너지 협력 모델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싶다. /차현정기자 hyeon@metroseoul.co.kr

2025-05-12 11:50:06 차현정 기자
[기자수첩] 아파트 수주전의 새 기준, ‘책임’

정비사업 수주전의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더 많이, 더 저렴하게 해준다는 번지르르한 약속이 경쟁의 본질이었던 과거와 달리 그 약속을 책임질 수 있는지가 조합원의 선택을 좌우하고 있다. 지난 1월 치열했던 서울 한남4구역 수주전에서 삼성물산은 현대건설을 상대로 압승했다. 조합원들은 공사비보다 이행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삼성은 최소 12억원의 이주비 보장 등 구체적인 계획을 내세운 반면, 현대는 이전 한남3구역에서 추진했던 백화점 입점 공약이 무산됐던 전력이 발목을 잡았다. 경기 성남 은행주공아파트 재건축 수주전도 흐름은 비슷했다. 포스코이앤씨는 총 1834명의 조합원 투표 중 1333명이 지지해 경쟁사인 두산건설을 누르고 최종 시공사로 선정됐다. 포스코이앤씨는 사업비 8900억원 중 2400억원을 무이자로 대출 지원하는 금융 패키지를 제시했고, 조합이 일반분양 시점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 수익 극대화 전략도 함께 내놨다. 두산건설은 비교적 낮은 공사비를 내세웠지만 금융 지원과 장기적 안정성 면에서 신뢰를 얻지 못했다. 조건이 좋아 보여도 과거처럼 틀어진 사업이 반복된다면 조합원들에겐 그 자체로 부담이다. 수년 이상 걸리는 긴 사업 여정을 감안하면 시작보다 완주할 수 있는 역량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현재 입찰이 진행 중인 용산정비창 전면1구역도 마찬가지다. HDC현대산업개발과 포스코이앤씨는 각기 수익성과 금융 안정성을 앞세운 전략을 제시했지만, 조합은 이 계획이 끝까지 실행될 수 있는 지에 중점을 둘 것으로 보인다. 앞서 한남4구역과 은행주공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조합은 이제 단순한 가격이나 공사비보다 버틸 수 있는 구조와 현실성 있는 제안을 본다. 수많은 정비사업에서 나타난 공사비 증액, 금융 갈등, 공약 이행 실패에 대한 학습 효과가 쌓이면서 판단 기준이 바뀐 것이다. 이제 조합원의 눈은 화려한 설계나 조건이 아니라 그 뒤에 숨어 있는 실행력과 책임감에 가 있다. 어떤 제안을 하느냐보다 그것이 실제로 지켜질 수 있는 구조인가가 판단 기준이 됐다. 수주전은 결국, 끝까지 해낼 수 있는 시공사를 가리는 시험대다.

2025-05-11 12:47:33 전지원 기자
[기자수첩] 자사주로 밸류업 외치지만… 저평가 늪 벗어나지 못한 기업들

정부의 밸류업 가이드라인이 제시된 지난해 5월부터 올해 1분기까지 상장사들의 자사주 취득 금액은 20조원을 넘어서는 등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지만, 정작 시장에서 기업들은 저평가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상장사 812개사 중 565개사 즉 전체의 69.58%가 여전히 PBR(주가순자산비율) 1배를 밑돌고 있다. 1년 전(66.29%)보다 오히려 저평가 기업이 더 증가했다. 기업들은 자사주 매입과 배당 확대를 통해 주주환원에 나섰다. 자사주 소각은 유통 주식 수를 줄여 주당 가치를 높이는 즉각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배당 확대 역시 주주환원 정책의 일환이다. 겉보기엔 주주 친화적인 행보처럼 보였지만 주가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기업들이 단기적 주가 부양을 위해 자사주 매입을 반복하지만, 기업의 본질적 경쟁력이나 경영 투명성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자사주 매입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 후, 정작 기업이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단기 주가 부양'에 그치고 있다. 기업가치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주가는 쉽게 반등하지 않는다. 지난 3월 국회에서 통과된 상법 개정안은 기업 지배구조 개선의 출발점이 될 수 있었다. 개정안의 핵심은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것이었다. 경영진이 주주 가치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도록 강제하는 장치였다. 그러나 재계의 강력한 반발 속에 정부는 거부권을 행사하며 법안은 무산됐다. 해외 투자자들의 시선은 여전히 부정적이다. 한국 시장이 '불투명한 지배구조'라는 오명을 벗지 않는 한,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구조적 문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이사회의 독립성, 대주주 견제 장치, 소액주주 보호 시스템 등 지배구조 전반에서 한국 시장의 후진성을 지적하고 있다. 단기적인 자사주 소각이나 배당 확대가 아닌, 경영 투명성과 주주 친화적 경영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저평가는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진정한 밸류업이 실현되려면 주주 가치를 경영의 중심에 놓는 체질 개선이 선행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2025-05-08 13:35:09 원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