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그룹, "힘 있는 사외이사 모셔라"..주주 목소리 귀 기울이는 곳도
장·차관이나 법조계,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등 권력기관 출신들이 주요 그룹 계열사의 사외이사 자리를 꾀찰 것으로 보인다. 일부 기업 사외이사 후보는 노무현 정부 인사나 노동조합 출신 등이 거론되고 있어 '정치 외풍'을 막기 위한 조치라는 해석도 있다.
이에 따라 주주를 대신해 경영진을 감독·감시해야 할 사외이사들이 오히려 외부 방패막이에 활용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식회사에서 사외이사는 대주주와 경영진의 경영활동을 감시·견제하는 구실을 한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정부는 '견제받지 않는 권력'인 대주주와 경영진의 전횡과 무리한 의사결정이 경제위기의 큰 원인이 됐다고 보고 이들을 견제하고자 사외이사제도를 전격 도입했다.
10일 재벌닷컴이 지난 8일까지 공시된 자산 기준 10대 그룹 상장사 95곳의 주주총회 안건을 분석한 결과, 이들 기업의 신임 및 재선임 사외이사 후보 129명 중 장·차관이나 판·검사,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금융감독원 등 권력기관 출신이 26.3%인 34명으로 집계됐다.
세부적으로는 판·검사 출신이 12명으로 가장 많았다. 나머지는 장·차관(10명), 국세청(7명), 금감원(3명), 공정위(2명) 출신 순이었다.
전직 권력기관 출신이 사외이사로 오는 것에 대해 전문가들의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경영 투명성을 높이고자 도입한 사외이사 제도가 기업의 로비창구이자 방패막이로 악용될 수 있어서다.
안상희 대신지배구조연구소 본부장은 "권력기관 출신 사외이사는 대관성 업무를 맡기기 위해 초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견제기능이 비교적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룹별로 보면 분석대상 10대 그룹 중 권력기관 출신 사외이사 후보 수가 가장 많은 것은 삼성그룹(8명)이었다.
삼성전자 사외이사 재선임 후보인 박재와 전 기획재정부 장관과 삼성바이오로직스 사외이사 신규 후보인 허근녕 전 청주지방법원 수석 부장판사, 삼성생명은 이창재 전 법무부 차관을 신규 후보로 올리는 등 삼성그룹 사외이사 후보 중 권력기관 출신자의 비율은 36.4%였다.
다음으로 권력기관 출신 사외이사 후보 비율은 GS그룹(57.1%), 현대중공업 그룹(55.6%), 한화그룹(50.0%) 순으로 나타났다.
권력기관 출신이 아닌 사외이사 후보로는 교수가 52명(40.3%)으로 가장 많았다. 또 회계사, 금융인, 전문 경영인 등이 사외이사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한편 삼성화재는 현재 김성진 전 조달청장, 삼성생명에 강윤구 전 보건복지부 차관 등 노무현 정부 인사가 현재 사외이사로 있다.
또 CJ ENM 사외이사인 박양우 중앙대 교수 역시 노무현 정부 시절 문화관광부 차관을 지낸 정통 관료 출신이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로 내정되면서 반대로 대기업 이익을 대변하는 후보라는 논란을 키우고 있다.
올해로 사외이사 제도가 도입된 지 스물 한 돌을 맞았지만, 여전히 '거수기'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는 것. 금융시장 한 관계자는 "기업들이 힘있는 관료나 정치인 출신 등을 사외이사로 선임해 이사회에서 방패막이로 활용하는 경향이 있다"며 "사외이사 스스로 역할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문제가 있는 사외이사를 재선임하지 못하도록 주주가 행동에 나서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주주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전문성을 갖춘 인사를 영입하는 기업들도 하나 둘 생겨나고 있다.
삼성전자는 김한조 하나금융 나눔재단 이사장과 안규리 서울대 의대 교수를 사외이사로 영입힌다. 사내에서는 안 교수가 보건·환경안전부터 사회공헌까지 기업 경영의 ESG(환경·사회책임·지배구조) 분야에 객관적인 조언을 해줄 것이란 기대감이 크다. 현재 서울대 사회공헌교수협의회 회장과 사단법인 생명잇기 이사장, 사단법인 라파엘인터내셔널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 무료 진료 등의 사회공헌 활동을 해왔고, 이를 인정받으며 앞서 2017년에는 사회봉사상 부문으로 호암상을 받기도 했다.
현대차그룹은 주주추천제를 처음으로 도입해 세계적 금융 전문가인 윤치원 UBS 그룹 자산관리부문 부회장을 선임할 예정이다. 이사회의 투명성과 독립성을 끌어올리고 주주들과 적극 소통하려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의 의지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SK그룹은 최태원 회장이 지주사인 SK㈜ 이사회 의장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한 가운데 사외이사인 염재호 고려대 총장을 후임자로 내정해 주목을 받고 있다. 국내 10대 그룹 중 사외이사에게 이사회 의장을 맡기는 것은 SK그룹이 처음이다.
LG그룹은 구광모 회장이 연구개발(R&D) 역량을 강조하고 있는 가운데 주요 계열사들의 학계 인사들을 사외이사 후보 명단에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