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100주년] <17>유묵에 담긴 백범 김구의 혼과 얼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요"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요라고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백범일지 '나의 소원' 중) '대한독립'은 김구 선생이 평생동안 열망하던 소원이다. 그의 일생에 걸친 유묵들이 조국독립에 대한 열망과 그날의 고통스러운 심정으로 점철된 것은 그래서다. 지난 21일, 서울 용산구 백범기념관 특설전시장에서 개최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 특별전 '큰 뜻, 붓에 담다'는 이 같은 김구 선생의 우국충정을 느낄 수 있는 전시였다. 김구 선생의 유묵을 천천히 감상하며 나라를 생각했던 김구 선생의 마음 하나하나를 곱씹어 봤다. ◆ 평생 간직한 절절한 충절 김구 선생은 청년시절 민족의식이 정립된 이후 일제의 침략에 신음하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백범의 나라사랑과 겨레 사랑은 순간순간의 어려움과 위기의 연속에도 강철같은 힘으로 솟아 올랐다. 신민회 사건(105인 사건)으로 일제에게 15년 형을 언도받을 무렵, 백범은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야밤에도 몇차례 죽었다 깨어나 의식이 희미한 상태에서 철장안으로 쏟아지는 달빛을 맞으며, 아픈 육신으로 괴로워하기 보다 나라를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을 반성했다. 이는 백범이 쓴 퇴계 이황의 시 '선죽교'에서도 나타난다. '충신이 나라의 위기를 맞아 죽지 않고 어찌하리'. 백범은 이황 선생이 포은 정몽주 선생의 충절을 기리며 지은 이 시에 깊은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비단 일제 침략에 반대하는 정의로운 독립투쟁뿐만 아니라, 일상의 모든 일에 있어서 '정의로운 일'이 아니면 결코 하지 않았다. 김구가 쓴 이양연의 시 '야설'은 이 같은 김구 선생의 성정을 잘 드러낸다. '눈을 밟으며 들길을 갈 때 함부로 걷지 마라. 네가 남긴 발자국이 뒤에 오는 사람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니'. 그 글귀는 후대에게 조국분단이라는 잘못된 이정표를 남기지 않기 위해 통일정부 수립을 갈망했던 백범의 마음을 나타낸다. ◆ 녹슬지 않은 열정 백범은 어떤 일을 맡거나 하고자하면, 그것이 큰 일이든지 작은 일이든 지 성실하게 하는 품성을 가졌었다. 맡은 일을 열성껏 성실하게 해내기 때문에 백범이 실제로 맡아서 한 일은 무엇이든지 잘 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이같은 성실함은 백범이 쓴 범준의 '심잠'에서도 잘 드러난다. '군자가 성실함을 보존해 잘 생각하고 잘 공경하면 천군(선비의 마음)이 태연해 온몸이 하늘의 명을 따르게 될 것이다'. 조바심에 흔들리지 않고 큰 뜻을 향해 성실하게 나아가야 한다는 백범의 마음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백범 품성의 또 하나 큰 특징은 '실질'을 매우 좋아하는 것이었다. 백범은 공리 공론을 가장 싫어했으며, 실질적 논의와 실천을 중시하고 좋아했다. 백범이 동학·유학·불교·기독교의 여러가지 종교를 모두 섭렵했을 때에도 그는 사람을 도덕적으로 교화시켜주고 독립을 지원해주는 종교 내용의 '실체'를 취했지만 그 종교의 이론에는 집착한 일이 없었다. '진실로 그 가운데를 잡으라'. 백범이 휘호한 '윤궐집중'은 그러한 그의 성품을 잘 나타낸다. ◆ 어릴적부터 키워낸 담대함과 포용성 '백범일지'를 보면 그의 담대한 성품이 어릴 때부터 뚜렷하게 드러난다. 백범은 나라를 위하는 일이고 정의로운 일이라면 남들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들을 용감하게 해냈다. 백범이 19세의 어린 나이로 동학의 팔봉 접주가 되고 해주성 전투의 선봉장이 된 일, 김이언 의병 부대에 투신한 일, 치하포에서 일본군 특무장교 쓰치다를 처단한 일, 한인애국단 조직과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획하고 지도한 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한국광복군을 창설한 일 등은 이러한 담대한 성품으로 이뤄진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백범이 휘호한 '산악기상'에서도 이러한 백범의 대범한 성격이 드러난다. 백범은 '산악과 같이 드높고 맑은 기상'을 지님으로써, 항상 호방하게 행동해야함을 강조했다. 또 백범은 공동의 목표를 가진 사람들은 자기와 생각이 달라도 서로를 포용하고 협동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백범이 임시 국무령이 되었을 때에 민주적인 국무 위원제를 추진한 것이라든지, 임시정부 말기에 좌파 독립운동 단체들과 인물을 화합해 일제 패망 후의 좌우 분열을 사전 방지한 통일 정부의 수립을 준비한 것은 이같은 포용성과 관련된 것이었다. 백범은 임정 말기에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공포한 후 좌파 민족 혁명당의 조선의용대를 포용,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해 광복군을 통일군대로 만들었다. 의정원에도 좌파 사회주의 정당과 단체 대표들을 야당 의원으로 영입해 의정원을 통일 의회로 개편했고, 임시 정부에 부주석제를 신설해 좌파 단체들을 대표한 민족 혁명당 위원장 김규식을 선임했다. 백범이 광복 후 남북 협상을 추진해 처음부터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 한 것도 이러한 백범의 포용성과 관련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국의 모든 민중들이 한 마음이길.' 백범이 쓴 '만중일심'에서 드러나는 독립운동가의 포용에 대한 갈망은 대립과 갈등이 빈발하는 현대사회에서도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