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국제영화제 기획/아를
얇은 책인데도 불구하고 도무지 진도가 안 나가는 것들이 있다. 최근에 읽은 '버닝 각본집'이 그랬다. 이게 대체 무슨 내용일까. 등장인물이 많은 것도 아니다. 주요 인물은 벤, 해미, 종수 세 명이 전부다. 인셉션처럼 복잡한 플롯도 아닌데 시놉시스, 트리트먼트, 시나리오를 2~3번씩 읽고, 책의 앞뒤에 붙은 감독의 말과 인터뷰를 전부 정독해도 버닝이 어떤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다.
각본집에 실린 인터뷰에 따르면, 이창동 감독은 만약 어떤 배우가 시나리오를 읽고 자신은 벤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를 캐스팅하길 포기했을 거라고 털어놓는다. 감독은 실제로 그런 배우가 두 명쯤 있었다며, 벤이라는 캐릭터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인물이라고 이야기한다. 버닝 촬영 막바지에 감독이 배우에게 지나가는 말로 '벤이 연쇄 살인범이었을 것 같냐'고 묻자 스티븐 연(벤役)은 "대답하지 않을래요. 나만 알고 있게"라며 웃었다고.
재밌는 건 버닝을 본 사람들에게 물어도 전부 다른 답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열에 일곱 정도는 벤이 해미를 죽여서 종수가 그를 살해한 거라고 했다. 누구는 벤이 해미를 죽인 게 아니고 종수가 그녀를 살해한 것이고, 그는 죄책감을 벗기 위해 자신의 죄를 벤에게 뒤집어씌우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해미도, 벤도 전부 소설가 지망생인 종수가 상상 속에서 그려낸 인물이라는 파격적인(?) 대답도 나왔다.
'영화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는 이창동 감독의 작가론, 작품론, 인터뷰가 수록된 책이다. 버닝을 이해하는 열쇠를 얻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안고 책을 펴들었다. 인터뷰어로 참여한 김혜리 영화평론가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는 새로운 '나'가 되길 꿈꾸는 주인공들의 바람이 상상과 다른 형태로 실현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한다. 감독은 "원하지 않고 예상치 못했던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 삶이다"며 "달리 말하면 예측 못 한 사태가 닥쳤을 때 인물이 어떻게 그 속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아내느냐가 내 관심사다"고 이야기한다.
'버닝에서 어디까지가 종수의 소설이고 어디까지가 객관적 사실인지 모호하다. 창작자로서 상대적으로 무책임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는 안 했나'라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감독은 "버닝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의 구조가 가진 불투명함 자체를 감각적으로 느끼게 하려는 이야기"라며 "어디까지가 종수의 소설이냐는 부분은 지엽적이다"고 선을 긋는다.
그제사 책의 머리말에서 영화평론가 장 프랑수아 로제가 "이창동 영화가 암시하는 보이지 않는 세상은 오직 예외적으로 첨예한 현실 인식을 얻기 위해 끈질기게 분투하는 시네아스트들에 의해서만 포착될 수 있는 것이다"고 한 이유를 알게 됐다. 240쪽. 1만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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