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이란 뜨거운 상황을 통해 포착한 인간 조건과 인간 존엄
[안치용의 세계문학 파노라마] <12>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1933년)
혁명이란 뜨거운 상황을 통해 포착한 인간 조건과 인간 존엄
소설 '인간의 조건'(La condition humaine)은 1927년 3월 21일 밤 10시 30분에 이야기가 시작한다. 르포와 유사한 기술방식을 취하면서 국공합작의 혁명군이 지방정부를 정복하고, 다시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이 반혁명을 일으켜 공산주의자들을 몰살하는 과정을 그린, '4·12 상하이 쿠데타'라고 하는 특정한 시대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한국어로는 제목이 동일한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 에세이집이 앙들레 말로(1901~1976년)의 이 소설 못지않게 유명하다.
◆'싯다르타'가 될 뻔한 '싯다르타'와 다른 소설
이 소설에서 다룬 인간의 조건은 예컨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 처럼 흔히 짐작함 직한 포괄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인간의 조건을 다룬다기보다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구체적인 삶의 조건 안에서 인간이 자신의 조건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가 제시한 일종의 인간 조건 같은 것과 다르다. 상황 속 인간의 '존엄'과 '고뇌'와 연결지어 소설은 인간의 조건을 운위한다. 소설에서 인간의 조건을 직접 언급한 대목을 살펴보자.
"인간이 단 하나밖에 안 가진 목숨을 어떤 사상을 위해서 버리다니 인류의 독특한 어리석음이라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이 질문에 주인공 '기요'의 아버지이자 지식인으로 캐릭터가 설정된 '지조르'가 "그렇습니다. 인간으로서 조건을 견뎌내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겠죠"라고 대답하며 인간의 조건을 거론한다. 이어 그는 "인간이 이해를 뛰어넘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지려고 하는 모든 사상은 이 조건의 바탕을 인간의 존엄이라는 것 위에 놓고 그 올바름의 증명을 막연하게나마 지향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여기에 해당하는 사상으로는 노예에게 그리스도, 시민에게 국가, 노동자에겐 코뮤니즘이 제시된다. 소설이 천착한 인간의 조건은 인간다움을 결정하는, 즉 이렇게 해야 인간이다라고 하는 그런 막연하지만 정체성이라고 할 것의 조건이라기보다는, '어떤' 인간이 되기 위해서 꼭 해야 할 의무의 의미로 쓰이는 듯하다. 의무를 조건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소설 속 문장으로는 "인간 세계에서 인간 이상의 것이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 인간의 조건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가 가장 명시적으로 제목의 뜻을 진술한다.
그러려면 인간이 가진 한계의 목록을 내어놓아야 한다. 어떤 고양된 인간다움에 도달하는 과정 또는 결과를 보여주려면 무엇에서 벗어나야 하는지를 정의해야 한다. 그러나 한계만을 논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조건'은 'from'과 'to'를 혼용한다. 또한 문맥에 따라서는 인간 조건이라는 말을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볼 수 있다. 소설이 암시한 '정의'와 살짝 결이 다르게 인간의 조건은 인간이 존엄해지는 'to'의 의미로써 종종 사용된다. 존엄하기 위해서 인간은 고뇌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남의 목소리는 귀를 통해서 듣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재단하고 정제할 수 있지만, 자기 목소리는 자기의 목구멍을 통해서 듣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의 목소리를 타인의 목소리 처럼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정제할 수 있는 고뇌를 통해서 자신의 존엄을 인정함으로써" 'to'의 의미로 인간 조건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까지라면 '인간의 조건'은 '싯타르타'와 비슷한 소설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특정한 중국 역사의 시기에 국공합작과 반혁명이 일어나고 이 과정에서 흑과 백이라는 선택지가 주어졌을 때 사람들이 선택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극한에 몰린 인간이 어떻게 선택하는가, 경계에 있는 게 아니라 경계를 넘어섰을 때 그들이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또는 존엄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선택하는가를 보여준다. 보편적인 인간론을, 양자택일의 선택지밖에 없는 혁명이라는 구체적이고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선택해서 존엄을 성취하는지를 통해 보여준다.
◆'to'만 존재한다면
소설의 등장인물은 각각 하나의 전형이다. 앞서 언급한 '지조르'와 '기요' 외에 '첸', '카토프', '메이'가 주요 인물이다. 프랑스인 아버지(지조르)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낭만적인 지식인 혁명가 기요는 한자로 '청(淸)'이다. '청(淸)'이란 이름을 택한 데에, 또 중국 피가 섞이지 않은 혼혈을 중국 역사를 다룬 소설의 주인공으로 다룬 데에 아무 의미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기요의 아내 메이는 독일인이고 카토프는 러시아인으로 직업혁명가이다. 국공내전은 세계혁명의 무대이자 인종과 무관한 보편적 인간 조건을 설정한다.
혁명가들에게 공통적으로 죽음이 주어지고, 기요뿐 아니라 모두가 죽을 때에 맑은 존엄의 양식을 취한다. 그들은 느닷없이, 망설임 없이 죽어버린다. 죽음에 도달하는 스토리텔링이 약하다고 판단할 법도 하다만, 소설이 다룬 사태의 죽음 성격이 그러하여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변론할 수 있지 않을까.
기요는 자기 몫의 청산가리를 주저 없이 털어먹어 자기 존엄을 확인한다. 의학도이기도 한 카토프는 주변 동지들에게 청산가리를 모두 나눠줘서 그들이 존엄한 방식의 죽음을 선택하도록 돕는다. 대신 자기에게 주어진 개 같은 죽음, 혹은 고통스런 결말을 기꺼이 감수한다. 죽음에서도 타인을 배려한다. 고통을 통한 존엄의 승화가 죽음의 장면에서 카토프를 통해 표현된다. 첸도 자살하는데, 장제스 암살을 기도하다가 실패하고 거사 현장에서 하반신이 날아간 상황에서 스스로 총을 자기 목구멍에 집어넣어 방아쇠를 당긴다.
'인간의 조건'은 공산주의 이념에 애정을 가지고 접근한다. 공산주의가 다수의 인권과 존엄을 존중할 수 있는 보편적인 체제로 설정돼 있어, 흑과 백의 선택밖에 없을 때 많은 사람이 공산주의를 떠받들다가 스스로 그 이념을 위해서 죽어가는 형태를 취한다.
살아남은 인물은 메이와 지조르이다. 매력적인 꼰대 지식인으로 묘사된 은퇴한 대학교수 지조르는 처음부터 아편에 의지하면서 시대와의 불화를 견뎌낸다. 더불어 선지자다운 면모를 유지한다. 성서의 선지자들은 그들의 배면에 신이 있어서 선지자로서 삶을 버틸 힘을 얻었다. 반면 지조르와 같이 고뇌와 고독밖에 없는 격변기의 공산주의자 지식인에게는 그런 힘이 없었고 절대고독 앞에서 자신의 신념을 담대하게 선언하고 전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지켜내게 한 유일한 힘은 아편이었다. 필부와 다름없는 인간 조건으로 인간 조건을 넘어서 보편을 설파하는 역설이 지조르에게 나타난다.
지조르에게서 인간 조건에 관한 'from'과 'to'가 동시에 나타나는 변증법적 종합을 목격한다. 나약했지만 그런 방식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고, 마지막에도 아들이라는 이념의 혈연, 자기 인생의 의미, 또는 인생의 동지가 죽어버린 상황에서 아들을 넘어서 전우의 시체를 넘어서 앞으로 나아가는 전사적인 이미지로 비약하지 않고, 또다시 아편에 의지해서 뒤에서 머물러버린다. 그런 결말이 나쁘지 않았다.
인간 조건이라는 게 항상 'to'만 있는 게 아니다. 'to'를 지향하지만 'from'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이중적인 존재로서 끝내 우리는 'from'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to'만 존재한다면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었을 것이다. 지조르라는 인물이 매력적인 이유는, 신플라톤주의 도식을 쓴다면 '일자(Hen)'를 향한 'to'라는 지향과 'from'이란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기에, 보편적인 인간의 지향과 개별적인 한계, 그리고 인간 모두가 가진 성취와 좌절을 두루 성찰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노인과 여자
지조르와 관련해서 실천 방식의 다양성으로 그를 포용할 수 있을까 하는 다소 사변적인 토론이 가능하다. 끊임없이 아편에 의지하는, 즉 'from'의 인간 조건에 구속되어 있지만 또한 끊임없이 'to'라는 인간 조건을 이야기하는 유형의 지식인도 필요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빨치산이 되거나 빨치산을 죽여야 하는 선택 외에 다른 선택이 없는 순간이라면 선택해야 한다. 성서 표현으로는 장사 지낼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죽은 자들끼리 장사 지내게 하고 갈 길 떠나야 하는 상황이다. 소설의 지조르 또한 장사 지낼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떠나야 하였을까.
내가 지금보다 많이 어렸을 때 생각은 지조르가 한심한 늙은이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비겁이 일상인 나이가 되어서인지 장사를 지내며 아편 정도를 피울 권리 비슷한 게 지조르에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기울어진다. 그것 또한 인간 조건의 하나가 되어야 하지 않나.
메이라는 등장인물은 지금 관점에서는 마뜩잖은 캐릭터이지 싶다. 혁명가라는 성격이 주어졌지만 메이는 혁명가라기보다는 혁명가 아내의 모습을 노정한다. 같은 혁명가인 다른 주요 인물들이 장엄한 죽음을 맞이하지만 메이에게는 혁명가의 아내로 살아남아 상처를 극복하고 마치 순정만화 주인공 캔디처럼 의연하게 이겨내는 삶을 말로는 펼쳐놓는다. 메이가 유기적으로 전체 구조에 끼어있지 못한 채 계속 서걱거린다는 느낌을 받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물론 메이의 생존을 이유로 해피엔딩 혹은 희망이라는 해석 또한 가능하고 존중되어야 한다. 아무튼 그 뜨거운 혁명의 시대는 가고, 지조르 또한 아편 속에 잦아들었을 텐데, 메이는 어떤 삶의 흔적을 남겼을까. 혹은 어떤 삶이 가능한 것으로 주어질 수 있었을까. /안치용·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ESG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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