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도시 서울에 푸른 빛 생기가 돌기 시작한 건 1990년대 말 매연을 내뿜던 공장 굴뚝이 하나둘 사라지면서다. 도시에 있던 공장들은 땅값이 싼 지방으로 떠났다. 서울시는 공장이적지가 방치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부지를 사들여 공원으로 가꿨다.
성동구 성수동 삼익악기 공장, 강서구 등촌동 성진유리 공장, 강동구 천호동 파이롯트 공장이 각각 성수공원, 매화공원, 천호공원으로 바뀌었다. OB맥주 공장 이전터엔 1만8600여평 규모의 영등포공원이 생겼다. 시는 당시 공장이적지에 있던 건물 42개동을 철거하고 산책로와 전시관, 잔디마당과 함께 500여명이 모일 수 있는 야외무대를 갖춘 공원을 만들어 1998년 7월 시민에게 개방했다.
◆우범지대서 주민 쉼터로 변신
지난 6일 공장부지에서 녹색 쉼터로 되살아난 영등포공원을 찾았다. 지하철 1호선 영등포역 1번 출구에서 올림픽대로 쪽으로 303m(4분)를 걸으면 공원 입구에 조성된 삼각형 모양의 광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삼각광장 옆엔 원형광장이 있고 이 자리에서 시계방향으로 배드민턴장, 게이트볼장, 분수대, 문화마당, 풋살경기장, 자연학습체험장, 무궁화동산이 차례로 들어섰다.
시계가 오후 5시 정각을 가리키자 사람들이 분수대로 몰려들었다. 분수의 물줄기가 '쏴아아'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로 솟구쳤고 더위에 지친 아이들은 비처럼 내리는 물방울을 맞으며 즐거워했다. 영등포본동에 사는 설모(56) 씨는 "맨 처음에 이사 왔을 때 우리 아이들이 학생이었는데 영등포공원에 노숙하는 아저씨들이 너무 많아 무섭다고 학교 갈 때 공원을 가로질러 가지 못하고 신길역쪽으로 먼 길을 돌아갔다"면서 "그런데 지금은 공원을 깨끗하게 잘 다듬어 놔서 사람들도 많이 오고 양지화가 돼서 기쁘다"며 활짝 웃었다.
영등포구는 낙후 시설에 대한 민원을 해소하고자 2015년부터 매년 공원 개·보수 공사를 실시해왔다. 첫해에는 장미원을 확대 조성했고 낡은 놀이시설과 운동기구를 새 걸로 바꿨다. 2016년에는 주민들의 요구를 수용해 대형시계를 설치하고 풋살장의 인조잔디를 교체했다. 이듬해에는 미관을 저해하는 담장 외관을 새단장하고 수목 생육환경 개선을 위한 보호판을 두는 등 공원경관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고 구는 덧붙였다.
이날 공원을 방문한 시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신선놀음을 즐겼다. 너른 잔디밭 위에 누워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는 젊은이들, 동년배들과 장기를 두는 어르신들, 배드민턴이나 조깅 등 운동을 하는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양천구에서 온 김원식(80) 씨는 "서울시내 한복판, 역세권에 이런 쉼터가 있어서 행복하다"면서 "예전에는 이 동네가 굉장히 시끄러운 동네였는데 10년 만에 와보니 천지개벽 수준으로 달라졌다"고 주장했다.
김 씨는 "영등포역 뒤편 외진 곳이라 대낮부터 술 먹고 싸우는 사람들, 부랑자가 많은 범죄소굴이었다"면서 "주먹이 센 왕초들이 천막을 치고 이곳을 점령하다시피 해 올 곳이 못 됐는데 전부 싹 사라졌다"며 놀라워했다.
구는 공원에 CCTV를 추가로 달고 기존에 단순 경광등 역할을 하던 화장실 비상벨을 경찰서와 연계해 설치하는 등 범죄 발생으로부터 주민 안전을 지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비맥주 공장터에서 나오는 물은 약숫물?
공원 한복판에 놓인 담금솥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담금솥은 맥주 제조의 가장 첫 과정인 맥아와 홉을 끓이는데 사용되는 대형 솥으로, 코끼리 얼굴에서 양쪽 귀를 떼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다.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흙빛 담금솥은 영등포공원이 옛날에 오비맥주 공장이 있었던 자리라는 사실을 시민들에게 상기시켰다. 안내푯말엔 "이 장소는 1933년부터 맥주를 생산한 우리나라 최대 맥주회사인 오비맥주 공장터로 1997년 공장이 이천으로 이전하면서 서울시가 영등포공원으로 조성해 시민들에게 휴식공간으로 제공하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과거 맥주공장이 있던 자리라는 역사적 사실로 인한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공원 한켠 수돗가에서 주민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한 중년 여성이 어르신에게 "여기에서 페트병에 물을 담아가지 말고 집에 있는 수돗물이랑 똑같으니 그거 받아서 마시라"고 조언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몸에 좋은 물이라 떠가는 것이니 상관 말라"고 쏘아붙였다.
영등포구 주민 이모(54) 씨는 "어르신들이 아리수가 수돗물인지 모르시고 큰 물통에다 물을 받아다가 공원에서부터 힘들게 낑낑대며 집으로 다시 가져가시는데 참으로 안타깝고 딱하다"며 혀를 끌끌 찼다.
영등포구 관계자는 "공원이 오비맥주 공장이 있던 자리라 여기에서 나오는 지하수가 약숫물처럼 건강에 좋고 깨끗하다는 속설이 있어 어르신들이 물을 많이 떠 가신다"며 "음수대에 '아리수 수돗물'이라고 붙여놔도 잘 믿지 않으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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