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1월부터 세계 최초로 '주기적 감사인 지정제'가 한국에서 시작한다. 회계법인은 새로운 기업과 새로운 감사 계약을 맺는 만큼 '표준감사시간제' 도입도 본격화할 전망이다. 회계 개혁의 시작점인 '신(新)외감법'의 조각이 맞춰지고 있다.
하지만 상장사의 반발이 만만찮다. 신외감법 도입이 기업에겐 상당한 회계 부담이 불가피해서다. 일부 회계법인의 '갑질' 사례도 드러나고 있다. 회계 개혁은 시작됐지만 회계업계와 기업 간 의견차는 좁혀지지 않는 모양새다.
13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오는 11월부터 주기적 감사인 지정제가 시행됨에 따라 총 220개 기업의 감사인이 바뀔 전망이다.
◆ 감사인 지정제 11월 시행
주기적 감사인 지정제는 회사 대신 증권선물위원회가 감사인을 지정하는 것이다. 6년 자율선임 후 3년은 증선위가 지정한 감사인에게 감사를 받는 식이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시가총액 상위 100대 기업 중 23개사의 감사인도 바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삼성전자는 40여년 만에 처음으로 감사인을 교체한다.
이 처럼 주기적 감사인 지정제는 '파트너십' 형태도 견고하게 다져진 회계법인과 기업 간의 관계를 감사인과 피감사인의 관계로 만드는 것에 의미가 있다. 감사인에게 기업은 더 이상 '고객'이 아니다.
감사인 지정제의 시행으로 '표준감사시간제' 적용도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회계법인이 새로운 기업과 감사계약을 맺으면서 표준감사시간에 맞춘 새로운 조건을 제시할 가능성이 커서다.
표준감사시간제는 기업 규모와 업종별로 적정한 감사시간을 규격화한 것이다. 그동안 한국 기업들은 미국 기업과 비교해서 감사시간이 20~40%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충분한 감사가 이뤄져야 감사 품질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게 도입의 취지다.
◆ 신외감법 도입에 기업들 '한숨'
이 같은 상황에 대해 기업들의 속앓이도 상당하다. 기업들은 신외감법 도입에 따른 회계 부담이 과중하고, 급진적으로 이뤄져 속도를 맞추기 힘들다고 토로한다. 특히 경제단체는 표준감사시간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김종선 코스닥협회 전무는 "다양한 업종의 코스닥 기업을 업종별 11개 그룹으로만 나눈 표준감사시간제의 실효성을 인정할 수 없다"면서 "기업과 회계업계가 공동으로 외부연구용역 등을 통해서 표준감사시간 산출방식을 도출하는 등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실제 표준감사시간 도입에 따라 감사비가 네 배 가까이 오른 기업도 나왔다. 감사시간이 늘어난 데 따른 감사비용 증가다. 기업은 높아진 감사 리스크와 급등한 감사비에 이중고를 겪고 있다.
표준감사시간을 산출한 한국공인회계사회는 3년마다 표준감사시간제를 업데이트 하는 등 계속해서 기업과 대화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미 업계 의견을 반영해 표준감사시간제 감사시간 상승률 제한을 걸고, 자산 200억원 미만 비상장사는 적용 대상에서 빼는 등 많은 후퇴가 있었다.
금융당국에서도 이른바 '회계 개혁'에 따른 부작용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감사인이 '을'의 위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성을 강화시켰으나 오히려 '갑질'을 하고 있다는 제보가 이어지면서다.
특히 디지털 포렌식 조사를 오남용하는 사례가 나왔다. 이는 기업이 제출한 자료를 믿을 수 없거나, 제출을 거부할 때 감사인의 권한으로 컴퓨터 등 모든 자료를 압수수색할 수 있는 권한이다. 이 경우 기업 경영에 차질을 빚게될 뿐만 아니라 감사비는 2배에서 4배까지 급등한다.
◆ 곳곳에서 부작용 속출
최준우 증권선물위원회 상임위원은 "일부 감사인이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기업에 과도한 비용 부담을 지운다던가 퇴직자의 핸드폰까지 압수하는 등 오남용이 발생했다"며 "오남용 예방을 위한 감독 지침을 마련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기업에 대한 비적정 의견이 쏟아지는 것도 문제다. 기업뿐만 아니라 투자자의 불안도 가중되고 있다. 감사인의 독립성을 이유로 감사보고서 작성 전 기업과 합당한 커뮤니케이션도 피하는 것이다.
한 IR담당자는 "주총에 임박해서야 우리 회사의 감사의견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있다"면서 "충분히 대화와 조정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다"고 아쉬워했다.
회계 개혁의 강도가 강화될수록 기업과 감사인의 갈등도 커질 수 있다.
오는 11월에 시행되는 주기적 감사인 지정제는 자산규모 1900억원 이상 상장사가 대상이지만 매년 자산규모 순으로 적용 범위를 넓혀가 결국 모든 상장사가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표준감사시간제 역시 올해는 자산 2조원 이상 기업이 대상이지만 2021년에는 자산 200억원 이상 상장사들도 일부 적용대상이 될 정도로 범위가 넓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