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중앙회 한우개량사업소에서 개량한 보증씨수소.
【서산(충남)=김승호 기자】안녕! 난 충남 서산이 고향인 한우야.
설이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요즘 '부정청탁금지법' 때문에 우리 한우를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다는 소식이 계속 들려.
외면받고 있어 슬퍼해야 할지, 덕분에 오래살게 됐으니 기뻐야할지 모르겠어. 어쨌든 마음이 많이 복잡한 것은 사실이야. 우리를 키워주는 농가는 제 값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더욱 그렇겠지.
내 소개를 시작할께. 나는 2011년 3월 8일이 생일이야. 초봄에 태어났으니 팔자가 좋다고 해야 할까. 그건 상상에 맡길께.
나에게도 사람들이 갖고 있는 주민등록 같은 것이 있어. KPN995가 내 번호지. 아빠소는 KPN673, 엄마소는 224023680이야.
KPN이 뭐냐구. 영어가 나왔다고 당황할 것은 없어. KPN은 'Korean Proven Bull No'의 약자로,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나라에서 인증한 소라는 뜻이지. 눈치가 빠르다면 영문 뒤에 붙은 숫자가 인증받은 순서라는 것쯤은 쉽게 알겠지. 당연히 아빠소와 할아버지소는 나보다 번호가 더 빠르겠지. 실제로 할아버지소는 KPN310이야.
그런데 모든 소들이 나처럼 'KPN○○○'이 붙는 것은 아니야. 그냥 단순한 소가 아니라는 말이지. 한우 중에서도 최고의 한우, 즉 '보증씨수소'에게만 인증번호가 붙어. '미스터 코리아 한우'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아.
내 자랑 같아 쑥스럽긴 하지만 왜 그런지 설명을 해 줄 테니 잘 들어봐. 그 비밀을 알고 나면 더욱 놀라게 될꺼야.(에헴)
우선 나를 이해하려면 '씨수소'란 단어를 먼저 알아야 해. 씨(정액)를 공급하는 수컷소라는 뜻이니 대단한 말(말이 아니고 소인가?)은 아니야. 'KPN○○○'이 바로 보증씨수소들에게만 붙여주는 식별번호인 셈이지.
나같은 보증씨수소 한 마리가 태어나기 위해선 5년 정도의 긴 시간이 걸려. 한 마리당 2억원 정도의 돈도 들어가지. 그러니까 내 몸값이 최소한 2억원은 되는 셈이야.
충남 서산에 있는 농협중앙회 한우개량사업소 전경. /김승호
그럼 5년간 어떤 과정을 거쳐 씨수소 한마리가 탄생하는지 설명해줄께. 좀 지루하겠지만 잘 들어봐.
우선 24개월의 '당대검정'과 36개월의 '후대검정'을 각각 거쳐야 해.
당대검정은 씨수소의 후보를 뽑기 위해 아빠소와 엄마소, 그리고 후보가 될 해당 수소의 능력을 판단하는 것을 말하지. 후대검정이란 후보씨수소 자신이 아닌 자신과 같은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후대 송아지들을 대상으로 검정하는 단계야.
여기서 잠깐. 소도 사람과 같이 임신기간이 10개월이라는 것쯤은 상식으로 알고 있겠지.
나와 같은 최고의 소가 탄생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잘 생긴 아빠소, 아름다운 엄마소가 있어야겠지. 아빠 역시 최고의 보증씨수소, 엄마도 최고의 씨암소를 뽑아 계획교배를 시키는 것도 이 때문이야.
아빠의 우량한 정액을 전국에 있는 수 많은 엄마소(씨암소)에게 이식해 1년에 8000~9000두의 송아지를 낳을 수 있도록 하지. 엄마소 한 마리가 1년에 한 마리의 송아지 밖에 낳지 못하기 때문에 엄마소 역시 8000~9000두가 필요한 것은 물론이야.
낳은 송아지 중에선 암컷과 수컷이 있겠지. 9000마리의 송아지가 태어났다고 가정하면 약 4500마리는 수컷이겠지. 이 수컷 가운데서 유전적 능력과 외모, 질병검사 등을 통해 약 900마리 정도를 우선 선발하게 돼.
5대1의 경쟁률을 뚫은 이들 송아지를 '당대검정우'라고 불러. 그리고 다시 이들을 대상으로 마블링이 얼마나 많은지, 잘 생겼는지, 근육 면적은 얼마인지, 무게 등에 따라 66마리를 골라. 1차 관문을 넘어선 이들을 후보씨수소로 불러. 최종적으로 씨수소로서의 보증을 받기 직전의 예비 명단인 셈이야.
45000여 마리 중에서 단 66마리만이 후보 자격을 갖게 되니 경쟁률이 엄청나다고 볼 수 있지.
*계획교배를 통해 나온 송아지 숫자는 때에 따라 유동적임.자료 : 농협 한우개량사업소.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야. 이들 66마리를 갖고 후대검정을 진행하는데 다시 정액을 채취해 계획교배를 시키게 돼. 이 때는 1년에 약 1200마리의 송아지를 낳도록 하고 이들이 5개월 정도 됐을 때 이중에서 다시 800마리를 선발해.
아빠소와 같은 유전적 형질을 가진 자식소가 많을 수록 아빠소의 능력을 판단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 물론 선발된 송아지 역시 질병이 없어야 하고 아빠소와 엄마소의 혈통도 완벽해야 해.
그리고 800마리 중에서 24개월이 됐을 즈음엔 후보씨수소(66마리) 1마리당 자식소 10마리 정도씩을 골라 도축을 해. 슬픈 일이지만 아빠소가 가진 유전적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기 위해 자식을 대신 희생시키게 되는 셈이지. 일부 자식소는 초음파 등으로 검증 작업을 해 역시 아빠소의 우월함을 판단하지.
그렇다고 66두의 후보씨수소 모두 보증씨수소가 되는 것은 아니야. 이 같이 자식소들에 대한 후대검증을 통해 66마리 중 최종적으로 30마리만이 보증씨수소가 될 수 있어.
훌륭한 아빠소와 엄마소에서 태어난 송아지라고 하더라도 보증씨수소가 될 확률은 통상적으로 0.1%, 즉 1000마리당 1마리 꼴이야. 후보씨수소에게도 'KPN○○○'가 부여되지만 이들이 최종적으로 보증씨수소가 돼야만 해당 번호가 유효해. 후보군에서 그냥 도태될 경우 번호는 그냥 폐기되기 때문이지.
대한민국 한우의 혈통을 지킬 보증씨수소는 이렇게 탄생하는 거야. 어때, 대단하지 않아. 내가 바로 진골인 셈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