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을 처음 제안한 김영란 전 대법관. /뉴시스
"아이 괜찮습니다. 인원수만 늘려서 보고하면 문제없어요. 막말로 누가 우리가 술 마시는 거 따라다니면서 보긴 합니까?"
서울 여의도의 한 술집, 계산대 앞에서 들려오는 대화 내용이다. 김영란법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종로의 한 술집에서는 각자내기(더치페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한 대관 담당자는 돈을 모으며 "아니 대통령도 안 지키는 김영란법을 우리는 왜 지키고 있는 거야. 우리 중엔 대통령 친구 없어요?"라며 농담을 던진다.
먼 친척에게 전화가 왔다. 아이가 장애가 있어 주의사항을 교사에게 전달하고 싶은데 개인적인 부탁은 '부정청탁'이 되느냐고 묻는 질문이다. 학부모와 교사가 통화만 해도 부정청탁이 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일명 '김영란법'이 시행된 지 3달도 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김영란법은 여러 의미로 사문화돼가고 있다. 점차 김영란법에 적응해 가는 모습도 보이지만 일각에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입장도 보인다.
최근 대통령의 기업 총수 독대, '비선실세' 최순실씨의 수 많은 부정청탁 행위 등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 각계의 고위층에서 벌어진 부패가 밝혀지며 김영란법의 대상이 국민이 아닌 정부 고위직을 향해야 한다는 항의가 나오고 있다.
공무원, 교사, 기자 등을 대상으로 한 김영란법은 지난해 3월 27일 제정과 동시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 SNS 등 각종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이미 김영란법 대상자를 범법자로 몰며 법의 빠른 시행을 외치기도 했다.
예방법보다는 김영란법 대상자를 이미 범법자로 보고 제재하겠다는 의지가 강했었다. 하지만 같은 시기 청와대에서는 대통령을 등에 업은 비선실세가 기업에게 돈을 뜯거나 자신의 이권을 챙기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특혜를 받는 일이 일어났다.
대통령의 최측근인 정책조정수석이 기업에게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은 특정 개인의 이권을 위해 불공정한 특혜를 제공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또 대통령 지인의 딸이 승마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심사위원들이 감사를 받고 검찰이 투입되는 웃지못할 사건도 일어났다.
양향자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21일 박 대통령을 향해 "소위 김영란법을 위반한 자질도 없는 저질 공무원으로 판명났다"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정작 사회 고위층의 부정·부패 단속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국민에게는 무리한 법을 강요한다는 지적이다.
기자로써 김영란법 전과 후를 따져보자면 사실 큰 차이가 없다. 하루 일정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3만원 이상의 밥을 먹기란 쉽지 않다. 특별히 개인적인 선물을 받아본 기억도 없다. 취재원 또는 홍보실 직원과 저녁 술자리에서 종종 3만원을 넘겼던 기억이 있지만 그 역시 업무의 연장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빨리 끝나는 술자리가 반가울 정도다.
적응해가는 국민과 달리 정부 고위층의 부패 규모는 갈수록 커져간다. 개인 공무원과 기업 오너의 비밀스런 청탁, 금품수수를 넘어 대통령이 개입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사기극'이 펼쳐지고 있다.
기업 홍보업무를 맡고 있는 문모(가명)씨는 "상실감이 크다. 우리는 3만원, 5만원, 10만원 조심스럽게 계산하며 벌벌 떠는데 저 윗사람들은 김영란법을 무슨 법인지도 모르는 것 같다"며 "어떻게 더 큰 권력을 가질수록 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국민이 아닌 권력자가 주인인 나라 같다"며 비판했다.
'최순실 게이트'와 함께 대통령도 김영란법 대상자에 포함되느냐에 대한 의문도 던져지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김영란법에 선출직 공무원이 포함됐으며 대통령을 위한 예외조항을 따로 달지 않았기 때문에 대통령 역시 이에 포함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영란법 시행 전이지만 이미 박 대통령이 김영란법에 위배되는 행위를 한 정황이 포착된 상황이다. 기업총수를 독대해 최순실씨의 사금고와 같은 미르·K스포츠재단에 거액을 출연할 것을 요구한 행위는 부정청탁이 된다. 최씨가 대통령에게 일정 금액 이상의 건강보조 약물이나 의복 같은 것을 제공했다면 이는 금품수수에 해당할 것이다.
김영란법을 처음 발의한 김영란 전 대법관은 지난 3일 세계변호사협회 '아시아태평양 반부패 콘퍼런스'에 참석해 현 사태에 대한 법적 책임을 언급했다. 김 전 대법관은 "요즘 보면 어떤 법리를 구상해서라도 측근을 이용한 리더에게 직접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