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오후 9시 여의도의 한 호프집에 단체손님이 일어선다. 카운터는 하나인데 카드는 5개를 내민다. 김영란법 금액에 맞춰 카드로 계산하기 위해서다. 각자 내기다. 김영란법이 만든 일상이다.
#.같은날 오후 10시 광화문 주변은 새벽녘 직업소개소를 연상시키는 모습이 연출됐다. 쌀쌀해진 날씨에 팔을 문지르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대리기사들이 곳곳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김영란법 이후 대리기사의 일거리가 줄어 하루 한건의 일도 간신히 잡힌다. 대리기사들의 한순만 들려왔다.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수수금지법)이 시행 한달(28일)을 맞았다. 그간 대부분의 국민들이 법 취지에 공감했지만 '혼란스럽다', '힘있는 사회지도층의 비리지 막을 수 있겠냐'는 우려가 있었다. 특히 일반 시민들의 경제적 피해를 초래한다는 반론은 여전하다. 변화된 사회상을 짚어본다.
항상 손님으로 가득했던 서울 종로, 강남, 여의도의 식당가의 테이블의 반만 찼다. 종업원의 수도 줄었으며 새벽까지 열었던 가게는 자정이 되면 하나 둘 문을 닫는다. 고급 한식집과 중식, 양식집은 2만원 대 메뉴를 내놨음에도 떠나는 손님을 잡을 수 없었다. 대신 편의점, 홈쇼핑의 매출은 늘었다. 김영란법 신고 포상금으로 한 몫 챙겨보려 했던 '란파라치'들도 하나 둘 일상으로 복귀하거나 새로운 일을 찾고 있다. 경찰은 문의전화만 올 뿐 실제 처벌을 받는 사람은 없었다.
◆한산한 서울 시내…울상과 반색 사이
신한카드가 김영란법 이후 법인카드 이용액과 건수 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김영란법 이후 요식업계 이용금액은 이전 대비 4.4% 감소했다. 2차 문화로 대표되는 유흥주점은 5.7% 줄었다. 반면 대표적인 집근처 소비인 편의점에서의 사용은 3.6% 증가했다. 홈쇼핑과 배달서비스다 각각 5.8%와 10.7%씩 늘었다. 빠른 귀가로 인해 집 주변에서의 소비가 늘어난 것이다. 오후 7시대의 택시 이용도 타 시간대비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의도의 한 외식업체의 경우 평소 자주 팔리는 한우와 고가의 민속주가 올려 있는 테이블을 보기 힘들다. 이곳에서는 저녁식사와 소주를 무한으로 제공하는 2만9900원의 '영란메뉴'를 선보였다. 실제 모든 테이블에는 소주나 맥주만 보인다.
시원하게 소주를 들이키던 한 직장인은 "3만원 넘을까봐 소맥(소주+맥주)도 무섭다. 100원만 더 추가되면 위법이 되기 때문"이라며 쓴웃음을 짓는다.
한산한 양식, 중식집과 반대로 상대적으로 '각자내기'(더치페이)가 편한 일식집에는 손님들이 가득 차있다.
갑작스럽게 쌀쌀해진 날씨에 두꺼운 옷을 챙겨 입은 대리기사들은 하염없이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다. "손님은 예전만 하나?"라는 기자의 질문에 "9시 넘으면 동네가 텅 빈다. 과거 손님이 과거 절반도 안 되는 것 같다"며 "오전에는 내일을 하고 밤마다 대리운전기사를 하고 있었는데 다른 일을 알아보는 중"이라고 하소연했다.
이 같은 사회 변하를 반기는 목소리도 있다. 매일 같은 접대로 술에 취해 귀가하는 게 일상이었던 기업 대관업무 담당 A씨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었다. 이른 귀가로 인해 운동 등의 여가생활도 할 수 있어 좋은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일자리마저 위태로운 기업 대관·홍보
김영란법에 가장 힘든 곳은 중소·중견의 대관·홍보담당자들이다. 부족한 예산으로 인해 밥 한 끼, 술 한 잔으로 홍보를 해왔던 중소·중견 기업들은 이제는 일자리마저 위태롭다.
한 중견기업 홍보담당자는 "김영란법 시행 이후 우리는 물론 상대도 만나서 식사하기를 꺼려한다"며 "예산이 없는 우리는 그나마 밥 한 끼 사는 게 유일한 홍보수단이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도 없다. 잘 만나주지도 않는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해야 하는 업무 자체가 위태로워 진 것"이라고 말했다.
대기업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신사업 등을 진행할 때 해당 유관부처 관계자와 상의를 통해 필요한 정보 등을 얻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것마저도 불가능하다.
각자내기를 통한 '스킨십'도 쉽지만은 않다. 법인카드가 아닌 각자 계산한 금액을 회사에 요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기업 대관담당자들의 세종시를 내려가는 횟수는 늘어가고 있다. 집이 서울인 세종시 공무원들이 일전엔 서울에서 저녁자리 겸 대관담당자들을 만났지만 이제는 사무실을 직접 찾아가지 않으면 얼굴조차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 기업 대관 관계자는 "업계 특성상 유관부처를 만나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모든 만남을 '금품수수', '로비'로 보는 법 때문에 의견 전달자체가 힘들다"며 "신사업 진행이 과거만큼 원활하지 않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한 달간 신고 301건, 처벌은 제로
경찰청에 따르면 법 시행일인 지난달 28일부터 이달 27일가지 김영란법 관련 신고는 총 301건에 달했다. 서면신고가 12건, 112신고가 289건이 접수됐다. 서면 신고는 모두 '금품 등 수수'와 관련한 신고로 공직자 4명, 경찰소속 일반직 공무원 1명, 일반인 7명이다. 부정청탁 관련 신고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이중 3명에 대해서 과태료 부과를 관할 법원에 의뢰한 상태다.
112신고는 위법 여부나 단순상담 등의 문의전화가 대부분이었다. 9월 29~30일 이틀간 123건의 전화가 오면 문의가 폭주했지만 현재는 대폭 감소한 상황이다.
한 달간 처벌이 없는 만큼 신고 포상금을 노린 '란파라치' 양성학원도 하나 둘 문을 닫고 있다. 시행 초기 관이 법 집행을 강하게 하는 만큼 모두가 조심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위반 사례를 포착하기 어려운 것이다.
인터넷 포털을 통해 파파라치 기법을 배워 온 B씨는 "란파라치를 통해 돈을 벌어보려고 고가의 장비도 구입했지만 쓸 일이 없다"며 "수 없이 많은 대상자 중 한명을 찾아서 따라다니는 것도 말이 안 되고 가격이 적혀있는 영수증을 확보하기도 어렵다. 아직까지 포상금 받았다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