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백화점 외벽에 'LOTTE'라고 쓴 글씨가 선명하게 보인다. /김승호
롯데그룹 사태가 점입가경이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 사이에서 비롯된 경영권 분쟁이 검찰의 비자금 의혹 수사로 확대됐고, 창업주 신격호 총괄회장은 정신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법원 판단이 내려져 후견인, 즉 법률대리인이 필요한 상황이다. 오너 일가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했던 롯데그룹 2인자는 스스로 목숨까지 끊는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롯데그룹은 올해 창립 49년(한국 롯데 기준)을 맞았다.
경남 울주군 출신으로 해방이 되기전 약관의 나이에 현해탄을 건너 일본 제과업계의 판도를 바꾸며 신화를 일군 롯데 신격호 총괄회장. 아이러니하게도 신 총괄회장이 일본에서 번 돈을 들고 한국에 호텔과 백화점을 짓기 위해 돌아왔던 4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풍전등화와 같은 현재의 롯데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다.
지금도 신 총괄회장(이하 신 회장)의 거처로 활용되고 있는 호텔 롯데와 그 옆 롯데백화점, 아니 롯데쇼핑 이야기다.
서울 중구 을지로와 남대문로 일대에 있는 롯데호텔, 롯데백화점 자리는 1970년대까지만해도 반도호텔, 국립도서관, 동국제강, 아서원이라는 중국집 등이 위치해 있었다.
1970년 11월 13일 당시 신 회장은 한국을 방문해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 등을 역임하며 서울시 도시계획을 입안했던 '대한민국 제 1호 도시학자' 고(故)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자신의 저서 '서울도시계획이야기' 2편에서 당시 박 대통령과 신 회장, 이후락 주일대사가 나눴던 대화 내용을 재현했다.
「 "내가 신 사장(신 회장)을 좀 보자고 한 것은 다름아니라 반도호텔 말이요. 잘 알다시피 반도호텔은 관광공사가 맡아서 경영하고 있는데 실적이 좋지 않아요. 국영으로서는 안 돼. 그 옆에 있는 국립도서관도 불하해 줄 테니 신 사장이 맡아서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관광호텔을 지어서 경영해주시오. 정부가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해주겠소."
신 사장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후락 대사의 사인을 받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각하의 뜻하시는 바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롯데호텔과 롯데백화점 등이 들어선 명동 전경. /서울역사박물관 디지털 아카이브
손 교수는 저서에서 "그것은 당시의 신격호가 사실상 일본인과 다름없었고 일본 부인몸에서 난 두 아들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재산 거의가 당연히 일본에 귀속될 처지에 있었다. 당시 한국정부 요인들 입장에서는 그가 일본에서 모은 막대한 재산의 일부만이라도 모국에 투자하게 하고 모국에 부동산의 상태로 남겨두게 하려는 속셈이었다"고 전했다.
그렇게해서 일본으로 돌아간 신 회장은 롯데호텔을 건립하기 위한 비밀팀인 '비원 프로젝트팀'을 일본 롯데내에 꾸렸다. 영문으로는 'PIWON Company'다.
반도호텔과 국립도서관 등이 있던 자리에 지하3~지상 33층, 객실수 1205실의 호텔과 지하4~지상 9층 규모의 백화점을 건립하는 것이 골자다. 당시 투자규모는 미화 4800만 달러였다.
여기서 잠깐 반도호텔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반도호텔은 일제시대인 1938년에 영업을 시작했다. 300명을 거뜬히 수용할 수 있는 연회장을 갖춘 반도호텔은 일제시대때 한반도 경제침략의 거점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에는 전쟁의 실상을 알리는 뉴스센터로 사용되기도 했다. 1953년 휴전 이후에는 정부가 이를 인수했다. 자유당 시절 이기붕 국회의장, 제2공화국의 장면 총리 등이 반도호텔에서 집무를 봤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일제시대에 문을 연 반도호텔은 한 때 일제의 한반도 경제침략 근거지가 돼기도 했다. 1972년 12월 27일 명동 반도호텔 앞을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서울사진아카이브
그러다 1973년 (주)호텔롯데가 설립됐고, 반도호텔 매입 작업이 본격화된다. 호텔롯데의 전자공시 보고서에도 설립시기는 '1973년 5월 5일'로 나와 있다.
박 대통령과 신 회장의 청와대 대화가 오간지 3년도 안된 시점에서 점점 현실이 되가고 있는 것이다.
손 교수의 '서울도시계획이야기'에 따르면 반도호텔 매각입찰은 1974년 6월3일에 실시됐다. 형식상은 일반공개경쟁입찰이었지만 호텔롯데가 단독응찰했다. 낙찰가격은 41억9800만원이었다. 반도호텔을 사들인 호텔롯데는 호텔 내부 집기 등을 일반시민에게 매각한 후 그해 10월부터 철거에 들어갔다. 당시 삼부토건은 3800만원을 받고 반도호텔 철거공사를 맡았다.
반도호텔과 함께 호텔롯데, 그리고 백화점이 들어서기 위해선 해당 부지에 있었던 국립중앙도서관도 골칫거리였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일제시대인 1923년에 지은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 시작됐다. 광복 이후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위키백과에도 도서관 개관(서울 중구 소공동)은 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15일로 표시돼 있다.
신 회장에게 전폭적 지원을 약속한 청와대는 국립중앙도서관을 남산에 있는 어린이회관을 매입해 이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남산식물원 앞에 있던 어린이회관은 접근성이 좋지 않아 원래 용도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결국 남산 어린이회관이 국립중앙도서관으로 탈바꿈했다. 1974년 12월2일의 일이다.
남산에 있던 어린이회관은 대신 성동구 능동 어린이대공원 인근의 땅을 받아 새 회관을 지었다. 이 회관에는 현재 육영재단이 들어가 있다.
이렇게해서 소공동에 있던 국립중앙도서관은 호텔롯데에 어렵지않게 매각할 수 있게 됐다.
남산으로 쫒겨났던 국립중앙도서관은 남산을 거쳐 1988년에 다시 현재의 자리인 서초구 반포동으로 옮긴 후에야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남산이라 접근성이 나쁜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당초 어린이회관으로 지은 공간을 도서관으로 활용하는 게 여간 불편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롯데호텔, 롯데백화점 등이 위치한 서울 명동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가장 상업이 발달한 대표적인 곳이다. 1976년 12월 명동의 전경./서울사진아카이브
호텔과 백화점 건립을 위한 롯데의 부지 매입이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가운데 복병이 나타났다.
바로 백화점이었다.
1970년대 서울시의 핵심 정책 중 하나는 인구 집중 억제였다. 특히 이는 4대문을 중심으로 한 강북지역의 가장 큰 숙제였다.
명동도 예외가 아니었다. 강북지역에 제조업체, 백화점, 고속버스정류장, 도매시장, 대학 등이 추가로 들어서는 것을 막았다. 4대문안에 있던 경기고, 서울고, 경기여고, 숙명여고 등 남녀 고등학교가 대거 강남으로 옮겨간 것도 이 정책의 일환이었다. 종로학원, 대성학원 등 주요 학원도 4대문 밖으로 밀려났다. 그런데 롯데그룹이 서울의 한복판, 그것도 명동에 백화점을 추가로 짓겠다고 한 것이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백화점이라고 칭했던 건물도 지상 9층이 전부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높이는 지상 25층으로 바뀌었다. 호텔 투숙객을 위한 편의시설 정도로 생각했던 부속건물에 고층 백화점을 들여놓겠다고 한 것이다. 호텔롯데에 쇼핑사업부도 설치됐다. 이 쇼핑사업부는 나중에 백화점사업부로 바뀌었다.
강력한 강북억제정책이 시행되고 있어 들어설 수 없는 지역에 대놓고 백화점을 짓겠다고 공언한 셈이다.
롯데백화점의 법인명은 지금도 '롯데쇼핑'이다./롯데쇼핑 전자공시 사업보고서 이미지 캡처
롯데는 호텔의 부속 지원시설로 지어진 건물을 '백화점'으로 바꿔달라고 서울시에 용도변경을 신청했다.
손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1972년 이래로 시행되어온 강북억제책으로 요식업 허가도 내주지 않을 때였으니 백화점 허가를 내줄 방법이 없었다. 신격호에게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한 박 대통령도 내심은 허가해주고 싶었다. 대통령의 의중을 읽은 정상천 (서울)시장도 허가해줄 의향이었다. 경제기획원장관·상공부장관 등 각료들도 모두가 내심은 허가쪽이었다."고 전했다.
그렇게 고심하던 찰나에 서울시의 한 직원이 아이디어를 내놨다. 롯데가 지은 판매시설을 굳이 '백화점'이라고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름을 '쇼핑센터'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백화점 허가신청'은 '쇼핑센터 허가신청'으로 바뀌었다. 지나던 소가 웃을 일이다.
지금도 법인명이 '롯데백화점'이 아니고 '롯데쇼핑'이 된 이유다.
서울시장은 청와대로 달려가 재가를 받았다. 재가가 나고 바로 허가가 났다. 그리고 롯데그룹은 명동에 '백화점'이 아닌 '쇼핑센터' 주인이 됐다.
롯데그룹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재가가 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979년 10월26일이었다.
롯데에겐 현직 대통령으로서 마지막 선물이 된 셈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롯데호텔과 롯데백화점 건립을 적극 지원했다. 그리고 '백화점'이 아닌 '쇼핑센터' 건립도 최종 허가했다. 롯데그룹이 그 소식을 받아들은 날은 1979년 10월26일이었다. 롯데백화점과 롯데호텔이 보인다. /김승호
*위 글의 많은 부분은 손정목 선생의 '서울도시계획이야기 2편'을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