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급 세단을 자처하는 차들은 많지만 인정받는 차는 드물다. 폭스바겐이 야심차게 내놓은 페이톤이 미국에서 판매 중단에 들어간 것이 좋은 사례다.
기아차는 2012년 K9을 선보인 후 'K900'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에 진출했으며, 몇 차례 손을 봤다. 소비자들의 지적을 받아들이면서 좀 더 완벽한 차로 거듭나기 위해서였다. 최근 등장한 '더 뉴(The New) K9'은 외관부터 달라졌다. 우선 애스턴 마틴의 것을 닮았던 2014년형의 라디에이터 그릴은 벌집 모양의 매시 타입으로 바꿨다. K7에서 봤던 스타일의 이 그릴은 지금까지 나온 K9의 것 중 가장 근사하다. BMW 7시리즈의 색채를 덜어낸 새로운 리어 램프도 멋지다. 이렇게 앞뒤 일부만 살짝 바꿨는데도 디자인의 완성도가 달라 보인다.
시승차는 새로 나온 V8 5.0이 배정됐다. K9 라인업 중 최고급 모델로, 현대 에쿠스, 쌍용 체어맨 W와 더불어 국산차 중 단 3개에 불과한 V8 모델이다.
V8 모델은 클러스터부터 다르다. 12.3인치 TFT LCD가 기계식 계기반 대신 그래픽으로 각종 계기 상태를 알려주는 방식인데, 유사한 타입을 쓴 재규어 XJ에 비해 훨씬 선명하고 잔상이 거의 없다. 이 클러스터는 과거 3.8 RVIP 모델에만 장착하다가 이번부터는 V8 5.0 모델에만 장착한다. 3.3 모델이나 3.8 모델을 고르는 이에게는 선택권이 없다는 게 아쉽다.
K9 5.0은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돋보인다.
V8 5.0 타우 엔진의 정숙성과 부드러움은 이미 미국에서도 정평이 나 있고, 그 존재감은 여전히 빛난다. 최고출력 334마력, 최대토크 40.3kg·m의 3.8 모델은 급가속 때 약간의 지체현상이 있지만 5.0 모델은 즉각적이고 빠르게 가속된다. 3.8 모델에 비해 최고출력이 91마력 높고 최대토크도 11.7kg·m나 높기 때문에 그 차이는 상당하다. 물론 5.0 모델이 3.8 모델보다 165kg 무겁긴 하지만 높아진 출력이 이를 상쇄하고도 남는다.
K9의 전 모델에 적용된 주행모드 통합제어시스템은 엔진과 변속기의 반응을 노멀, 에코, 스포트, 스노 등 4가지로 조절하는 장비다. 이 장비는 3.8 VIP 모델과 5.0 모델에 적용된 전자제어 에어 서스펜션과 결합되면 서스펜션 특성까지 변화시킨다. 특히 스포트 모드를 작동시켰을 때는 하체가 더 단단해지며 고속주행의 안정감을 더한다. 욕심을 부린다면 5.0 엔진의 강력한 파워를 살리기 위해 더욱 스포티한 모드가 있으면 좋을 듯하다. 물론 일상적인 주행에서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K9 5.0의 정부 공인연비는 도심 6.3km/ℓ, 고속도로 9.9km/ℓ로, 배기량을 감안할 때 괜찮은 편이다. 시가지와 간선도로를 절반씩 섞어 달린 이번 시승에서는 7.0km/ℓ의 연비를 기록했다.
K9 5.0은 각종 편의장비를 총 집결시킨 만큼 3.3이나 3.8 모델보다 다소 비싼 8620만원의 가격표를 달고 있다. 그래도 엇비슷한 성능을 지닌 메르세데스 벤츠 S클래스나 BMW 7시리즈, 아우디 A8, 렉서스 LS에 비하면 절반 정도의 가격이다. 혼자서 주로 운전한다면 4990만원짜리 3.3 프레스티지 모델이, VIP를 모셔야 하는 상황이라면 5.0 퀀텀이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