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브랜드 신사동 가로수길 잠식…사라진 국내상표 40여개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압구정로12길과 도산대로13길을 묶어 이름 붙여 진 곳. 600m 남짓 길이의 왕복 2차로에는 은행나무가 줄지어 있어 예술가의 거리 '가로수길'로 불리게 됐다. 처음에는 화랑과 국내 디자이너 쇼룸·편집숍 등이 다닥다닥 붙어 개성 넘치는 제품들을 선봬 '한국의 소호'로 알려졌다. 조용하게 유명세를 탔던 이곳이, 자본력을 앞세운 국내·외 SPA 브랜드와 글로벌 패션 브랜드들의 난립으로 지금은 전쟁터를 방불케 하고 있다. 대형 매장의 이전과 이 상권에 아직 등장하지 않은 해외 브랜드가 출점을 예고하고 있어 당분간 '쩐의 전쟁'은 지속될 전망이다.
◆커지는 패션 시장, 해외 SPA 브랜드만 산다
국내 SPA 시장 규모는 지난해 3조원을 돌파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글로벌 빅3 SPA 브랜드인 유니클로·자라·H&M의 지난해 매출 총액은 약 1조450억원으로 전년 대비 30% 상승했다. 이는 국내 전체 패션 시장 성장률이 4.4%에 불과한 데 비해 최대 8배에 달하는 수치이다.
업계 전문가들은 SPA 시장규모가 2015년 5조원 이상으로 커질 것으로 내다본다. 이미 국내에 자리 잡은 글로벌 SPA 브랜드들이 세컨드 브랜드를 통해 올해 국내 시장 진출을 예고한 상황이라 당분간 온도차는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는 게 관련 업계의 중론이다.
한 패션 브랜드 관계자는 "아직도 국내 진출하지 않은 글로벌 SPA 브랜드가 많다. 적어도 향후 5년은 글로벌 SPA 브랜드가 국내 패션 산업을 뒤흔들 것"이라며 "국내 패션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 특히 디자이너 개별 브랜드의 상황은 더욱 힘들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사라지는 '토종 패션 브랜드'
한국패션협회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사라진 토종 패션 브랜드는 40여개에 달한다. 대기업부터 중소기업에 이르기까지 본격적인 브랜드 구조조정에 들어간 것이다. 패션은 유행에 민감하고 시즌 상품 매출에 큰 영향을 받는 업종이라 소위 돈 되는 사업에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게 기업들의 일관된 입장이다.
이런 사정으로 국내 패션시장에서 잘나가는 토종 브랜드 찾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새로운 브랜드의 등장을 기대하는 것도 힘들어진 상황이다. 그나마 국내 대기업과 백화점들이 버티고 있지만 실상을 따져보면 그리 좋지않다. 해외 브랜드 판권 수입 사업에만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LF의 경우 전체 운영 중인 브랜드 중 절반에 가까운 수치가 해외 브랜드다. 현대백화점 계열의 한섬은 지난해 4개의 해외 브랜드 판권을 추가로 확보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의 경우 애초부터 해외 브랜드 수입을 기반으로 사업을 전개했다. 30개가 넘는 브랜드 가운데 올해 초 기준 국내 브랜드는 5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대기업의 해외 브랜드 유치를 무조건 질타할 문제는 아니라는 의견도 제시한다. 패션 브랜드 하나를 론칭해 정상궤도에 올리려면 적어도 5년은 걸린다는 게 업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의류사업은 어느 사업보다 초기 투자비용이 많이 들고 그만큼 위험 부담 요소가 크다는 것이다. 아울러 비교적 좋은 조건으로 판권을 사들일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 있기 때문에 이윤을 남겨야 하는 기업 입장에선 마다할 이유가 없다. 국내 패션 업계의 거대 자본 상황이 이렇다보니 토종 브랜드는 새싹 틔울 기회조차 사라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양날의 검, '한류'…정체성 확립이 우선이다
다시 가로수길로 돌아와 보자. 강남구청은 지난해 강남 각 지역의 특징과 문화를 살린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해 뉴욕의 소호 못지않은 명소를 만든다는 계획으로 '도심판 올레길' 한류거리(K ROAD) 조성사업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물론 가로수길도 포함돼 있다.
이 사업은 현재 올 12월까지 3단계에 걸친 한류스타거리(K STAR ROAD) 조성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이후 사업 전개에 대해서 아직 구체적인 사항은 정해진 게 없다고 강남구청 관계자는 전했다.
신연희 강남구청장은 지난해 거리조성 사업을 시작하며 "한류스타 거리로 시작되는 '한류거리(K ROAD)'조성사업은 강남문화를 알리는 출발점이자 뉴욕·런던·파리·상해 등 주요 도시에도 수출할 수 있는 글로벌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더 의미가 있다"면서 "한류의 강남 브랜드화를 통해 글로벌 명품도시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미 해외 브랜드가 절반 넘게 차지한 이곳에서 해외 브랜드들의 2차 공습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가로수길의 향후 모습은 한류를 '입고' 있어야 한다. 한류 브랜드화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내 디자이너의 산실이었던 이곳의 정체성을 되찾는 게 우선이다. 시간이 그리 많아 보이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