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12년 10월 100억원대 리베이트를 제공한 혐의로 절발된 A제약사의 리베이트 수사 과정에서 '기프트카드깡'이라는 새로운 리베이트 방식이 등장했다. 영원사업이 제약사 법인카드로 기프트카드를 구입한 후 상품권 취급소 등에서 일정 수수료를 제외하고 기프트카드를 현금으로 교환해 병원과 의사들에게 제공하는 불법적이면서 교묘한 리베이트 방법이다. 당시 이 사건은 보건의료계는 물론 우리 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겨줬다.
이런 리베이트 방식은 지난 2010년 11월 정부가 시행한 쌍벌제를 피하기 위해 시작됐다. 리베이트를 주는 제약사와 리베이트를 받는 병원과 의사 모두를 처벌하기 위한 제도지만 병원·의사와 '갑을'이라는 족쇄 관계에 묶여 있는 제약사에게 쌍벌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기프트카드깡과 같이 리베이트 방식이 시간이 갈수록 적발되기 어려우면서 지능적인 방법으로 변하고 있는 것뿐이다. 결국 리베이트가 등장한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는 대신 당장의 필요와 강압을 선택한 정부의 행동이 보건의료계 갑을 관계를 유지시키고 있다.
◆늘 '을' 위치의 제약사는 정부 탓?
지난 2012년 4월 제약업계에 태풍이 휘몰아쳤다. 53.55%에 이르는 '일괄 약가인하' 정책이 시행된 것. 하지만 제약사들은 정부의 강력한 정책 추진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일괄 약가인하는 정부의 파워게임을 여실히 보여준 장면으로 당시 국내 제약사들은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 모여 유례없는 대규모 궐기대회를 여는 등 처음으로 정부에 과감히 반기를 들었다. 그렇지만 딱 여기까지였다. 이후 제약사들은 힘을 모으지 못했고 각자의 살 길을 찾는데 급급했다.
결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과 같이 적극적인 반항을 한 제약사는 KMS제약·에리슨제약 등 약가인하가 시행되면 문을 닫아야 하는 소규모 영세기업뿐이었다. 매출 급감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일방적인 '갑질'을 수용하고 '갑을' 관계를 잘 유지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생각이 앞서 아무도 나서지 않은 것이다.
국내 제약사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사실 말 한 마디 쉽게 할 수 없는 무서운 관계다. 살아야하기 때문에 큰 소리 내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갑을 관계를 해결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지만 오히려 제약사가 만연 '을'의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 현재 정부다"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와 함께 정부는 창조경제 실현을 위해 제약산업을 육성·발전시키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또 2012년에는 '혁신형 제약기업' 43곳을 선정한 후 제약산업의 연구·개발(R&D) 및 해외 진출을 돕겠다고 밝힌 바 있다. 구체적으로 신약 R&D 투자를 늘리는 기업에게 ▲약가 우대 ▲R&D 지원 ▲세제 혜택 등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약속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들에게 실질적인 지원이 된 적은 없다. 그렇다고 제약사에서 먼저 이의 제기나 지원을 해달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물론 그들이 가진 불만을 솔직히 말할 수도 없다.
43곳 제약사들 중 15개 기업이 '리베이트 혐의'로 검찰과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조사를 받고 있고 정부가 현재 리베이트 혐의가 있는 제약사말고도 10여 개의 리스트를 확보했다는 점을 공공연하게 밝히며 제약사들을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속을 안 지키는 정부의 눈치를 제약사가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아울러 정부가 제시하는 리베이트의 경계도 불분명하다. 합법적인 마케팅과 불법 리베이트의 경계가 정부 마음대로 결정된다.
특히 의약품 판매 후 안정성 및 유효성에 관한 정보를 수집·검토하는 '시판 후 조사'에 대한 해석이 그때그때마다 다르다. 변호사 공증서가 있으면 합법적인 시판 후 조사가 된다고 하지만 정부는 지난해 로펌의 공증서를 보여주며 영업을 했던 한 제약사의 동영상 강의료 지급을 리베이트로 결정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말처럼 정부의 입장과 말에 따라 제약사가 움직여야 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정부, 보건의료계 갑을 관계 부추겨
지난 1월에는 종합병원들이 발빠르게 제약사에 공문을 보냈다. 계약 기간이 남았는데도 기존 계약을 파기하고 새로운 계약서를 쓰자는 것으로 '재계약 견적 협조 요청', '인하 검토 부탁' 등의 문구를 통해 제약사를 압박하는 보건의료계 또다른 '갑'의 갑질이다.
또 납품하는 의약품 가격을 30% 이상 깎아달라는 언급이나 일괄적으로 의약품을 5원에 납품하라는 주문도 포함돼 있다. 하지만 제약사들은 이를 거절할 수 없었다. 거절하면 해당 병원에서 더 이상 영업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발생한 것은 올해 2월 지난 2년 동안 유예됐던 시장형 실거래가제(저가 구매 인센티브제)가 재시행됐기 때문이다. 정부가 유통되는 의약품의 실제 가격을 알기 위해 이를 공개하는 병원에게 리베이트를 제공하는 것이 이 제도의 핵심으로 병원은 제약사를 압박해 의약품 가격을 내리고 정부에게는 돈을 받아 배을 채우겠다는 단순하지만 최고의 전략을 세운 셈이다.
결국 피라미드의 가장 위에 있는 갑인 정부가 의약품 시장에서 '갑을' 관계인 병원과 제약사의 위치를 더욱 악화시켜 불공정 행위가 기승을 부리게 된 것이다.
또 항상 갑을 관계의 주요 주제로 등장한 병원과 제약사·도매상의 '늦장 결제'의 해결도 정부가 가로막고 있다.
지난 2월 늑장 결제 관행을 타개하기 위해 관련 법안이 국회에 상정됐지만 작년 정기국회에 이어 이번에도 법안 처리가 무산됐다. 병원들의 대량 도산을 막기 위해서란다.
이에 대해 정부는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하면 지연 이자까지 더해 받을 수 있는 만큼 공정거래법 이외에 별도 법을 만드는 건 불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제약·도매업계에서는 "갑을 관계가 명확한 곳에서 어떻게 공정위에 병원을 신고할 수 있겠는가?"라며 반문한다. 병원을 신고하면 해당 병원과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얘기다.
이처럼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정부가 보건의료계의 갑을 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