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일찍이 16세기에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만들 정도로 조선분야에 우수한 기술을 보유했었다. 그러나 근대 조선공업의 발전이 늦어 1970년대 초 현대의 조선소 건설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연간 건조량이 20만 톤을 넘지 못하는 영세성을 면치 못했다.
그러한 가운데, 1960년대의 경공업 중심에서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전환한 정부의 경제정책과, 정주영 회장의 경영전략이 일치하며 마침내 1970년, 당시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울산의 미포만(尾浦灣)에 대형 조선소를 건설한다.
현대중공업의 창립 실화는 한편의 소설과도 같은 이야기로써 오늘날에도 세계 해운·조선업계에서 하나의 신화로 회자되고 있다.
당시 우리나라는 대한조선공사가 건조한 1만7000톤급 선박이 최대였고, 건조능력은 19만 톤에 불과했다. 현대중공업이 조선 사업을 하겠다고 하자 국내외에서는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다. 세계 시장점유율이 고작 1%에도 못 미칠 정도로 영세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선박건조에 대한 경험과 숙련된 기술자가 전무하고, 조선소 건설을 위해 엄청나게 소요되는 자금도 없는 상태에서 현대가 초대형 조선소를 건설하겠다는 발상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무모하고 불가능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현대가 조선 사업을 성공하면 내가 손가락에 불을 켜고 하늘로 올라 가겠다"고 했으며, 차관도입을 위해 외국을 돌아다닐 때는 "목선이나 만들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그 중에서도 일본은 한국의 경제규모(해운업)에 비추어 5만 톤급 선박의 건조능력만 갖추면 충분할 것이라는 주장을 폈고, 또 설령 조선소를 짓는다 하더라도 경험과 기술이 없어서 대형 선박은 만들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공공연히 퍼뜨리기도 했다.
정주영 회장은 1972년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기공식에서 세계 조선사상 전례가 없는 최단 공기 내 최소의 비용으로 초대형 조선소와 2척의 유조선을 동시에 건설하겠다는 내용의 사업계획을 밝힌 뒤, "우리나라 공업 발전과정에 획기적인 이 대사업은 초창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우리는 근면과 노력으로 정부와 국민의 협력을 얻어 이번 사업을 필히 성취시킬 결심입니다"라며 각오를 다졌다.
생전에 정주영 현대 창업자가 건조 중인 선박의 프로펠러 위에서 작업하는 직원을 격려하고 있는 모습./ 현대중공업 제공
정주영 회장은 조선소 부지로 점찍어둔 울산 미포만의 모래사장 사진 한 장과 5만 분의 1 지도 한 장, 그리고 영국의 '스코트 리스고우' 조선소에서 빌린 26만 톤급 초대형유조선(VLCC) 도면 한 장을 가지고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우여곡절 끝에 26만 톤급 유조선 2척의 수주에 성공해 조선소 건설을 위한 차관도입 문제를 해결했다.
또 조선소 건설에 착수하기 전인 1971년 말 그리스 선주 '리바노스(LIVANOS)'로부터 2척의 VLCC를 수주한데 이어 조선소 건설이 한창이던 1973년에는 23만 톤급 4척, 26만 톤급 4척 등 총 8척의 VLCC를 수주하며, 울산조선소 기공식에서의 약속을 당당히 지켜냈다.
도크 내 선박 건조 작업이 한창인 현대중공업의 모습./ 현대중공업 제공
이후 정주영 회장은 끊임없는 도전 정신을 바탕으로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며 10년 만에 현대중공업을 세계 1위 조선업체로 부상시키고 2006년에는 세계 최초 선박 건조량 1억 톤 돌파, 2012년 3월에는 선박인도 1억GT라는 대기록을 달성하는 등 '현대의 신화'를 써내려갔다.
정주영 회장의 개척정신과 적극적인 추진력으로 이루어낸 현대조선소는 세계 최대 규모의 중공업회사로 성장했다. 현재 현대중공업은 조선, 해양, 플랜트, 엔진기계, 전기전자, 건설장비, 그린에너지 뿐만 아니라 정유·석유화학, 무역, 금융, 자원개발 등 국내외 26개 계열사를 거느린 총자산 56조5000억원 규모의 종합중공업그룹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2013년 3월 공정위 발표 기준)
# 조선소 건설 관련 에피소드
현대조선소 설립 당시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정 회장은 1971년 9월 영국 버클레이 은행으로부터 차관을 얻기 위해 런던으로 날아가 A&P 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을 만났다. 조선소 설립 경험도 없고, 선주도 나타나지 않은 상황에서 영국은행의 대답은 간단히 "NO"였다. 정 회장은 그때 바지주머니에서 5백원 짜리 지폐를 꺼내 펴 보였다. "이 돈을 보시오. 이것이 거북선이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전인 1500년 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소. 단지 쇄국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었을 뿐, 그 잠재력은 그대로 갖고 있다"는 재치 있는 임기응변으로 롱바톰 회장을 감동시켜 해외 차관에 대한 합의는 얻었지만 더 큰 문제는 선주를 찾는 일이 남아 있었다.
그때 정주영 회장의 손에는 황량한 바닷가에 소나무 몇 그루와 초가집 몇 채가 선 초라한 백사장을 찍은 사진이 전부였다. 정 회장은 봉이 정선달이 되어 황량한 바닷가에 소나무 몇 그루와 초가집 몇 채가 선 미포만의 초라한 백사장 사진 한 장을 쥐고 미친 듯이 배를 팔러 다녔다. 결국 정주영 회장은 그리스 거물 해운업자 리바노스를 만나 26만톤 짜리 배 두 척을 주문 받았고, 조선소 건립과 동시에 2척의 배를 진수시킨 세계 조선사에 유일한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