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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제일반

[권기봉의 도시산책] <60>'동척' 관사가 남아 있다



최근 서울 경복궁의 서쪽 동네를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카페나 음식점들이 비집고 들어가면서 상업적인 분위기로 바뀐 북촌과는 달리 아직까지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는 탓이리라.

그런데 동네 골목을 걷다 보면 오래된 한옥 외에 일본식 건물들도 몇몇 발견할 수 있다. 통의동 대림미술관 근처에 있는 집들이 그것인데, 기와를 얹은 모습이 언뜻 한옥과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본식 건물임에 틀림 없다. 바로 일제강점기 당시 동양척식주식회사 직원들이 살던 관사(사진)이다.

줄여서 '동척'이라고도 부르는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제가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치한 일종의 식민지 착취기관이었다.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국유지를 강제로 불하받거나 헐값으로 매입하는 등 막대한 면적의 농토와 삼림지를 가로챈 뒤 일본인 이민자들에게 싼 값에 양도하는 일을 하곤 했다.

또 토지의 일부를 조선인 소작인들에게 빌려주고 50%가 넘는 고율의 소작료를 징수하기도 했으며, 영세 소작농에게 빌려준 곡물에 대해서는 20% 이상의 고리를 추수 때 현물로 거두어 들였다. 조선인들의 경제적 자립 기반을 허물고 일본인들의 조선으로의 이주를 장려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그 결과 수십만 명의 조선인 빈농들이 토지를 잃고 북간도 등으로 이주해간 반면, 동척은 1942년 당시 5억 평 이상의 임야를 소유하고 있을 정도였다. 조선총독부가 정치적인 방식으로, 조선은행이 경제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일본군이 군사적인 방식으로 조선을 수탈하고 조선인을 억압했다면, 동척은 토지를 수단으로 조선인의 삶을 망가뜨렸다.

그랬던 동척의 본거지였던 서울 을지로2가에는 지금 현재 외환은행 본점이 들어서 있을 뿐 당시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동척 건물에 폭탄을 던졌던 나석주 열사의 동상만이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직원들이 살던 통의동의 동척 관사만은 서른 채가량이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건재하다.

전통 한옥이 많이 남아있어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경복궁 서쪽 동네…. 동시에 그곳은 쓰라린 식민지 시절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지역의 이름을 두고 '서촌' '세종마을' 등 논란이 분분한데, 지명 분류 기준을 청계천으로 잡던 역사적인 맥락을 볼 때 '상촌(上村)'이나 '웃대', '웃마을' 등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서촌은 청계천의 서쪽에 자리 잡은, 지금의 중구 정동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었다.)/'다시, 서울을 걷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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