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증막더위, 찜통더위, 가마솥더위, 불볕더위….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올여름 덮친 폭염을 한마디로 정의하긴 힘들 듯하다. 습도까지 높은 무더위가 우리 몸에 익숙하지 않은 데다, 올해는 전력난에 따른 냉방온도 제한으로 공공기관은 물론 백화점·대형마트·은행 등 대형시설마저 시원하지 않아 괴로움이 더하다. 어떻게든 무더위를 나려는 이들이 묘안을 짜내면서 우리의 일상도 '헉' 소리나게 적응하는 중이다.
직장인 유현미(34)씨는 최근 어둑어둑한 퇴근길 집 앞에서 사람들이 쓰러져있는 줄 알고 기겁했다. 열대야를 피해 아파트 주차장에 신문지를 깔고 잠자고 있던 동네 주민들이었다. 유씨는 "하루 종일 더위에 지친 건 알지만 체면은 포기한 듯 거의 속옷차림으로 길거리에 나와 있는 모습에 놀랐다"고 말했다.
넥타이 정도만 푼 점잖은 '쿨비즈룩'을 고집해왔던 직장인들의 옷차림도 폭염버전으로 바뀌고 있다. '오늘 제 옷차림이 아주 시원할테니 놀라지 마세요' KGC인삼공사의 안진택 과장은 요즘 업무미팅 전 이 같은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반팔 티셔츠 아래 반바지와 운동화를 착용한 모습 때문이다. 안 과장은 "냉방을 줄이면 사무실 온도가 30도를 훌쩍 넘기 때문에 예전보다 과감한 옷차림도 실속스타일로 통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원한 곳을 찾아다니는 이들의 분투기도 한창이다. 올여름 최고의 피서 명당으로 떠오른 곳은 커피전문점들이다.
장인현(45)씨는 지난 주말에도 오전 일찍 아내, 중학생 딸들과 집 앞 커피전문점을 찾았다. 눈치가 덜 보이는 구석 자리에 앉아 각자 책을 읽거나 스마트폰으로 놀며 3~4시간을 보냈다. 장씨는 "더위를 피해 가족 단위로 움직이면 비용이 꽤 들어 2만원 정도면 간단하게 식사까지 해결할 수 있는 커피전문점이 우리 식구에겐 오아시스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외근이 많은 직장인들 사이에선 알뜰한 '메뚜기족'이 등장했다. 커피전문점에서 미팅을 한 뒤 같은 브랜드 매장을 찾아다니며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다. 브랜드 로고가 찍힌 컵이 좌석표인 셈이다.
주부들에겐 제때 식사를 챙기는 것도 큰일이 돼버렸다. 특히 찌고 볶고 삶는 요리는 가급적 피한다. 주부 박민영(30)씨는 "불 앞에 서 있는 것도 곤욕이지만 가스레인지를 한 번 켜면 집안 온도가 훅 올라가 물은 전기 주전자로 끓이고, 음식은 전자레인지로 데운다"고 말했다.
◆몸 축내느니…전기료 포기족도
얼린 생수에 수건을 감아 안고 자는 이들이 있는 반면 '전포(전기료 포기)족'들도 생겨났다. 에어컨 전기료 폭탄이 두렵지만, 더워서 일상생활을 제대로 못하느니 시원하게 할 일을 하겠다는 이들이다. 여성커뮤니티 '82쿡닷컴'엔 "몸 축나면서까지 에어컨을 아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병원비가 더 드니 적당히 타협하자." "(그나마 전기료 덜 나온다는) 제습 기능으로 밤새 틀고 잤다" 등의 글이 이어진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오는 23일이 아침저녁 선선해진다는 처서라는 것. 얼굴이 벌건 경비실 아저씨를 보고 차가운 매실차를 만들어드렸다는 한 네티즌은 말했다. "99%에게 힘든 여름 살살 지나갔으면 좋겠네요. 더워서 힘들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