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독립투쟁의 현장 서울 부민관
서울시청 맞은편에 있는 한 흰색 건물은 주변의 초현대식 건물들에 대비돼 더 이색적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부터 지난 1975년까지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다 지금은 '서울시의회'로 쓰이고 있는 건물이다.
국회의사당으로 쓰이던 근 25년의 시간 동안 이곳에서는 이후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각종 사안들이 논의되고 결정됐다. 이승만 대통령의 종신 집권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을 비롯해 박정희 대통령 집권 후에는 한일협정비준 파동과 3선개헌 파동, 그리고 국가보위법 파동 등이 일어나기도 하는 등 숱한 정치 격변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 있었다.
그런데 이 건물을 다시 보게 되는 이유는 건물 앞 화단 한쪽에 놓여 있는 작은 표석 때문이다. 거기엔 이렇게 새겨져 있다.
"부민관 폭파 의거 터 - 1945년 7월 24일 애국청년 조문기, 류만수, 강윤국이 친일파 박춘금 일당의 친일 연설 도중 연단을 폭파했던 자리"
애당초 이 건물은 지난 1935년 일제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과 같은 문화예술 공연장으로 만든 것이었다.
물론 실제로는 각종 친일 정치집회가 잇따랐다. 세 명의 청년들이 거사를 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조문기 등 세 명의 10대 청년이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있어 가장 마지막의 의거라고 할 수 있는 거사를 결행한 것이다.
당시는 해방을 채 안 달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이었다. 일제 말기로 갈수록 지지부진해 보이기도 했던 독립운동이 해방의 그날까지 끊이지 않고 계속됐음을 알 수 있는 현장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그 작은 표석 하나 뿐이다. 지난 1980년 태평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건물 대부분이 헐렸고, 85년 들어 제3별관을 헌 뒤에는 지금처럼 공중목욕탕 굴뚝같은 첨탑과 성냥갑 같은 어색한 건물만 남게 됐다.
세 명의 청년들도 하나둘 스러져 갔다. 가장 오랜 삶을 산 조문기 선생만 하더라도 평생을 일제잔재 청산운동에 주력하다 지난 2008년 향년 81로 생을 마쳤다.
하루 아침에 옛 서울시청사가 헐렸던 것처럼 이 건물이라고 수십수백 년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서울시의회 근처를 지날 때 한 번이라도 더 시선이 머무는 이유다.
/권기봉 '다시, 서울을 걷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