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서울 청계천에 가면 새로운 이름을 단 다리를 만날 수 있다. 그 동안 '버들다리'라고 불렸던 '전태일다리'다.
전태일 열사가 다리 앞에 있던 평화시장의 학생복 맞춤집 '삼일사'에 취직한 것은 그의 나이 17살이 되던 1965년이었다. 1년 전 대구에서 무일푼으로 상경한 전태일은 처음에는 구두닦이나 담배꽁초 등을 주워 팔다 곧 다리미질과 실밥 뜯기 등 허드렛일을 하는 평화시장 '시다'로 취직했다.
그곳에서 그는 지극히 열악하기만 한 노동 환경을 경험했다. 아침 8시 반에 출근해 밤 11시에 퇴근하는 삶을 반복해야 했고, 일거리가 밀릴 때에는 야근도 허다했으며, 심한 경우에는 사흘 밤낮을 연거푸 일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숙련된 노동자라고 해도 예외 없이 어깨와 등허리가 결려오는 것은 물론이었다. 우선 손목이 시어서 견딜 수가 없고, 심한 경우에는 점심 먹을 때 젓가락질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재단사나 미싱사의 경우 거의 전원이 신경성 소화불량과 만성위장병, 신경통 등을 앓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손가락 끝의 살갗이 닳고 닳아서 지문이 없을 정도였다.
문제는 건강진단과 재해보상 등 노동자의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하려고 만든 '근로기준법'이 당시에도 이미 존재했다는 점이다. 다만 그것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전태일 열사는 그런 것도 모르고 속고 살아온 자신들이 바로 '바보'라며, 평화시장의 동료 재단사들과 함께 '바보회'를 만들어 노동운동을 펼쳐 나갔다.
그러나 박정희 군사독재정권과 자본의 벽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절망의 한숨소리는 커져만 갔다. 한국의 비극적인 노동현실을 만천하에 고발하기 위해 결국 그가 택한 방법은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이는 것 뿐이었다. 그의 나이 22살 때였다.
그의 죽음 이후 오늘로 4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이 땅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 환경은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영하의 거리로 내몰리거나 타워크레인이나 송전탑에 올라가 수년 째 복직투쟁을 하고 있는 사업장도 여럿이다. 다리 이름만 바뀌었을 뿐 전태일이 추구하던 정신, 즉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은 아직도 요원해 보이기만 한다.
/권기봉 '다시, 서울을 걷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