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에 폭설까지 내렸던 지난 설날 오전. 오랜만에 서울 명동을 찾은 직장인 양민정(34)씨는 별세계를 만난 듯 깜짝 놀랐다. 쇼핑하기에 이른 시간인데도 중국·일본 관광객들이 미끄러운 빙판길을 부지런히 누비고 있었다. 양씨는 "화장품 매장을 갔더니 중국어로 인사하고 패스트푸드 매장에서도 햄버거를 먹는 내내 한국사람은 찾기 힘들어 마치 해외여행 중인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서울의 안방이라 할 명동의 주인이 바뀌는 모습이다. 국내 화장품숍에서 외국인들이 물건을 팔고, 골목에 늘어선 노점상들은 관광객들의 입맛에 맞춘 간식거리로 '세계 맛지도'를 그리고 있다.
명동 중앙로를 따라 늘어선 화장품 브랜드숍에선 요즘 한국말을 듣기 힘들다. 판매원들이 외국인으로 물갈이되고 있어서다. 명동에 매장을 5개 이상 운영하고 있는 더페이스샵, 네이처리퍼블릭, 잇츠스킨 등의 판매원 가운데 일본어나 중국어가 유창한 외국 출신 비율이 평균 60~70%, 많은 곳은 90%에 이른다.
그중에서도 중국인 판매원의 비중이 크게 높아졌다. 더페이스샵을 운영하는 LG생활건강의 김지숙 대리는 "일본인은 구매할 제품을 미리 찍어놓고 쇼핑하는 데 비해 중국인은 매장 직원의 상담과 권유를 적극 수용해 대량으로 구입하는 경향을 보여 중국인 채용에 더 신경을 쓴다"고 말했다.
명동 쇼핑의 또다른 재미인 '길거리 음식'도 외국인들의 입맛에 맞춰 무한진화 중이다.
떡볶이는 치즈를 올려 덜 맵게 만들었고, 쫄깃한 떡꼬치엔 독일식 소시지를 꽂아 '퓨전 요리'로 변신시켰다. 통감자 사이사이로 소시지를 맛볼 수 있는 '소시지 회오리 감자'는 쇼핑으로 출출해진 관광객들의 배를 채워준다. 이밖에 일본의 타코야끼, 벨기에 와플, 중국식 호떡 등 명동 골목마다 토종 메뉴를 업그레이드한 '세계 음식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있다.
명동 밀리오레 앞에서 노점상을 하고 있는 정모(48)씨는 "일본인들은 담백한 핫바를, 중국인들은 매콤한 양념 순대볶음을 좋아한다"며 "손님 열명 중 일곱, 여덟은 외국인인 것 같다"고 말했다.
명동이 '한류 쇼핑 1번지'로 떠오르자 기업들은 재빠르게 해외 진출 전 테스트 마켓으로 활용하고 있다. 최근 명동에 국내 최대 규모의 체험매장을 연 CJ올리브영은 한국 식품과 한류 아이돌의 음반·기념품을 판매하는 공간을 따로 만들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올해 중국 진출을 앞두고 관광객들의 소비 성향을 분석해볼 수 있는 '인큐베이팅'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제일모직의 '에잇세컨즈'를 비롯해 이랜드의 '스파오', 신성통상의 '탑텐', 에이다임의 '스파이시칼라' 등 현재 해외 진출했거나 검토 중인 국내 SPA패션브랜드들 또한 외국 관광객들이 사가는 아이템을 눈여겨보며 구매 패턴을 주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