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프리나무(유칼립투스)가 군락을 이룬 단데농 마운틴에 "삑!" 경적소리가 울린다. 증기기관차 퍼핑빌리가 출발하면 어른도 아이도 약속이나 한듯 발을 창밖으로 내밀고 동화처럼 100년전 마을로 들어간다. /사진가 김재욱 제공
■ 달콤짜릿 멜버른 워킹투어기
여기는 남반구의 최고층 빌딩 유레카88의 전망대 스카이덱88. 2평 남짓한 유리큐빅 '디 엣지'가 관광객을 실은 채 허공으로 미끄러져 나온다. 스릴과 고소공포가 뒤섞이는 순간 발 아래 펼쳐진 멜버니언의 여유로운 일상과 도도하게 흐르는 야라강변의 낭만이 시선을 낚아챈다. 88층 아래, 땅끝도시 호주 멜버른으로의 산책은 이렇게 아찔한 감탄과 함께 시작됐다.
/멜버른(호주)=허정현기자 iamnow@metroseoul.co.kr
요즘 멜버른 여행의 핫 트렌드는 워킹이다. 바둑판처럼 잘 구획된 멜버른에선 지도 한장이면 어디든 힘들이지 않고 찾아갈 수 있으니 산책이라고 해도 좋겠다.스카이덱88 전망대에서 도심의 큰 구획을 눈에 먼저 담아 본 후 지도를 펴 드니 산책 코스가 대충 정리된다.
남반구 최고층 빌딩인 유레카88의 전망대에 있는 유리큐브 '디엣지'를 관광객들이 체험하고 있다.
발 편한 단화를 신고 멜버른의 랜드마크로 통하는 페더레이션 광장과 플린더스 기차역으로 발길을 옮기니 제대로 코스를 잡은 느낌이다. 페더레이션 광장은 서울의 코엑스 같은 곳으로 멜버니언들의 만남의 장소이자 다양한 행사장으로 연중 활기를 띤다. 지도를 못챙겼다면 이곳의 비지터 센터를 활용하면 된다. 맞은 편의 '멜버른의 중앙역' 플린더스 역은 고색창연한 머스터드옐로 색깔을 입고 첨단디자인의 현대식 트램이 오가는 도로 앞에서 멋을 뿜어낸다
어느 도시든 그 속살은 골목에 숨어 있다. '레인 웨이'라 불리는 멜버른 도심 뒷골목 투어는 한나절을 멜버니언처럼 보내기에 충분하다.
그레이트 오션로드의 기암절벽과 12사도상을 헬리콥터를 타고 바라본 모습.
180개가 넘는다는 멜버른 골목 중 페더레이션 광장 건너 '미사 거리'가 눈길을 확 끈다. 국내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에 등장했던 '그래피티 골목' 호시어 레인으로, 매일 다른 표정으로 '그림 세수'를 하는 이 골목에선 카메라를 셔터를 무심히 눌러도 작품이 된다. 그래피티의 강렬함 덕분에 여자라면 드라마의 주인공인 배우 임수정, 남자라면 소지섭과 '크게' 다르지 않게 보인다.
미사 거리 조금 아래쪽에는 입도 눈도 달콤한 골목들이 즐비하다. 예쁜 맛집들이 늘어선 디그레이브스 스트리트와 맛있는 브런치가 넘치는 센터플레이스, 19세기풍의 높은 천장과 모자이크 바닥이 인상적인 블록 아케이드 쇼핑몰 그리고 1869년 세워져 멜버른에서 가장 오래된 아케이드인 로얄 아케이드에서는 가난한 여행자의 지갑도 슬슬 열린다.
멜버른 도심 한가운데 있는 랜드마크 플린더스역.
멜버른을 고풍스럽게 만드는 일등공신은 19세기 전후에 세워진 건축물들이다. 1856년 세워진 빅토리아주 의사당,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문할 때마다 묵는 윈저호텔, 고딕양식에 가장 충실한 건축물로 알려진 세인트 패트릭 성당 사이를 걷노라면 시간여행을 온듯한 착각에 빠진다. 특히, 패트릭 성당 바로 옆 피츠로이 가든에는 호주를 영국령을 선언한 제임스 쿡 선장의 생가를 옮겨 놓아 아기자기한 재미까지 더한다.
세계적으로 고딕양식을 가장 충실하게 따른 건축물로 통하는 세인트 패트릭 성당.
"파리보다 멜번에서 먹겠다."
뉴욕타임스의 음식 칼럼니스트 마크 비트번의 이 한마디 말은 '미식도시' 멜버른에서의 식욕을 돋운다.
걷느라 허기 진 배를 잡고 유레카88을 지나 야라강변을 따라 10여분 더 걸으니 '콜로니얼 트램카 레스토랑' 역이 나온다. 트램카 레스토랑은 멜버른의 명물인 트램(목재로 만든 전철) 두 량을 연결해 내부를 레스토랑으로 개조한 것으로 무료트램처럼 도시외곽을 순환한다. 달리는 레스토랑의 유리창이 스크린처럼 펼쳐내는 풍경은 한편의 영화이고, 특별한 날 멋있게 차려 입고 트램카 레스토랑에 올라 탄 멜버니언들의 행복한 미소는 그 어떤 음식보다 달콤하다. 물론 코스로 나오는 음식은 수준급이다.
멜버니언들에겐 낭만의 상징으로 통하는 '클로니얼 트램카 레스토랑'(왼쪽)의 출발을 기다리는 승객들.
멜버른의 맛을 논할 때 퀸 빅토리아 마켓을 빼놓을 수 없다. 170년 전 문을 연 전통 재래시장인데 '멜버른의 부엌'이라는 애칭으로 불릴만큼 다양한 식자재가 넘쳐나 셰프들의 쇼핑장소로도 유명하다. 이곳의 마켓투어 프로그램은 캥거루·토끼·양·악어고기 등 희귀 육류부터 치즈·와인·스파게티까지 맛 볼 수 있어 시식뷔페가 따로 없다. 든든한 배만큼이나 꽉찬 음식문화 체험이 추억으로 차곡차곡 쌓여간다.
맥주의 도시 멜버른의 골목은 저력있는 펍들을 숨기고 있다. 플린더스역 맞은 편에 150년 전에 문을 연 영&잭슨도 그중 하나다. 유서깊은 이 펍은 하우스맥주가 특히 유명하니 어디서나 마셔볼 수 있는 브랜드 맥주는 잠시 잊어도 좋다.
커피 한잔의 여유를 망치고 싶지 않다면, 멜버른에서는 주문을 '제대로' 해야한다. 한국의 에스프레소·아메리카노·카푸치노가 이곳에선 쇼트 블랙·롱 블랙·플랫 앤 화이트로 각각 불린다.
멜버른에서 멀지 않은 단데농 숲속엔 증기기관차 퍼핑빌리가 칙칙폭폭 달린다. 전세계 어린이가 사랑하는 동화 '토마스와 친구들' 속 주인공인 토마스 기차를 꼭 빼닮은 퍼핑빌리와 풍채도 수염도 산타할아버지를 꼭 빼닮은 기관사들이 삽으로 석탄 원료를 채워넣는 모습은 동화같다. 뽀얀 연기와 함께 출발을 알리는 기적소리가 '삐익~'하고 울리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발을 동동 구르며 어린 아이가 된다. 단데농 마운틴이 1800년대 초 개발될 당시의 벌목 나무 운반기차인 퍼핑 빌리가 현재는 추억 열차가 되어 하루 3번, 방학땐 하루 4번 동심을 실어나른다.
단데농 숲속 동화마을에서 빠져 나와 멜버른 동북쪽으로 1시간쯤 달리면 그림같은 야라밸리를 만난다. 야라의 뜻처럼 '끝없이' 포도밭이 펼쳐진 이곳은 크고 작은 와이너리 50여개가 모여있는데 락포드, 도메인 샹동, 야랴포드 등에서는 다양한 와인을 무료로 시음할 수 있다. 몇몇 와이너리에선 레스토랑을 운영해 와인과 환상의 궁합을 자랑하는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멜버른에 왔다면 '죽기 전에 꼭 가봐야할 명소' 그레이트 오션로드를 빠뜨릴 수 없다. 멜버른에서 차로 3시간여를 달리면 마주하는 이 환상적인 해안도로는 국내엔 2000년대 초반 현대차의 CF 촬영장소로 화제가 된 곳으로 최근 도로를 따라 총장 100km의 트레킹코스(4~5일 소요)가 조성됐다.
도로 이름에 붙은 '그레이트'는 제1차 세계대전(The Great War) 종전 후 퇴역군인들의 일자리 마련을 위해 이 도로 건설공사가 시작됐기 때문인데 그 풍광 자체만으로 이름값을 한다.
짧은 일정의 관광객들이라면 프린스 타운~렉 비치 구간에서 하이라이트를 맛볼 수 있다. 최고높이 70m, 남극에서 내달려 온 파도마저 한낱 거품처럼 왜소해 보이게 하는, 이 위대한 절벽의 클라이맥스는 바닷물을 뚫고 어깨를 나란히 한 12사도상 사암바위들과 만나는 곳이다. 바닷바람의 쉼 없는 습격에도 요동없는 거대한 '덩치'들의 향연을 헬리콥터에서 내려다 보면 더 '그레이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