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가 근 6년째 메트로신문에 상담 칼럼을 쓰고 있는데 숱한 고민 사연을 접하다 보면 결국 모든 고민은 자신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나 역시도 욕망 덩어리인 한 인간으로서 그로 인한 질투심이나 자괴감에 힘들고 몸까지 아파 봤지만 그럼에도 인생을 인생답게 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건 변함없이 욕망이라 생각해 왔다.
한데 그 욕망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자신. 불행히도 많은 이들은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기량이 안 되거나 노력을 충분히 안 하며 애초에 욕망 설정 자체가 잘못된 경우도 허다하다. 이는 실로 비극이다. ‘내가 되고 싶은 나’와 ‘현재의 나’ 사이의 갭이 클수록 좌절하고 방황하고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지니까. 영화 ‘인셉션’에서 쭈글쭈글한 노인들이 매일 노인정 가듯 ‘꿈을 꾸려고’ 수면센터를 찾은 모습은 퍽 인상적이었는데 그들에겐 ‘꿈의 세계’야말로 유일하게 욕망을 구현할 수 있는 희망의 ‘현실 세계’였던 셈이다.
반면 영화 밖 우리들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며 마주하기 싫은 현실을 직시하며 살아가야 한다. 뭐 말이야 간단하다. ‘내가 되고 싶은 나’와 ‘현재의 나’를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노력해서 성취하거나 기대치를 현실화시키는 것밖엔 없다. 거기서 대개 인간은 양 갈래로 나뉜다. 삶의 작은 디테일에서 행복을 찾으며 욕망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사람, 혹은 악마의 유혹을 받더라도 욕망을 이루려고 몸부림치는 사람. 굳이 편들자면 나는 후자의 삶의 자세에 공감을 하는 편이다. 사사로운 기쁨은 꿈을 향한 정면 노력 그 다음의 디저트 같은 거라고 생각하니까.
물론 가끔은 그 욕망이라는 게, 주변의 영향으로 정교하게 조작되기도 하여 정작 당사자는 자신이 진정으로 뭘 원하는지 잘 모른 채 냅다 달리는 것일 수도 있고, 인간성을 상실한 성취주의라 비난받기도 쉽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선 그와 똑같이 ‘욕망에 대한 타협’ 역시도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때로는 ‘스스로를 용서하라’는 듣기 좋은 주변의 위로와 격려는 인자한 천사의 탈을 쓴 악마의 속삭임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