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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국회/정당

[임시정부 100주년] 검사에서 독립운동가로… 韓 의회정치 기틀 마련한 홍진

1921년 11월 12일 미국 워싱턴에선 태평양·극동지역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태평양 국제회의'가 열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워싱턴 회의를 민족 자결주의에 근거한 외교 독립운동의 마지막 기회로 인식했다. 임시정부는 회의 참석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는데, 이를 계획하고 추진한 인물이 제3대 임시의정원 의장 홍진(1877.08.27~1946.09.09)이었다.

[b]◆'자수성가' 검사에서 독립운동 변호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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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 제3대 임시의정원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홍진은 서울 차동(현재의 서소문)에서 삼형제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부친을 여읜 홍진은 편모 슬하에서 컸다. 1898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그는 한성평리원 주사를 거쳐 1899년 평리원 판사가 됐다. 이후 1905년 충북 충주재판소 검사로 전보돼 근무하던 중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 식민지가 되자 검사직을 사직했다.

사직서를 내던진 홍진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독립운동가 변호사로 활동했다. 이후 독립운동이 조직활동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했고 국내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계획한다. 홍진은 13도 대표자 대회와 국민대회 등을 거쳐 한성정부를 수립한 후 국외에 이를 알리기 위해 상해로 떠났다. 홍진을 통해 국내 임시정부 수립 사실을 알게 된 상해 독립운동조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박차를 가했고,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을 구성한다. 이틀 후인 13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공포했고, 홍진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한다.

같은 해 5월 2일 임시의정원 4차 회의에서는 재정문제가 논의되자 홍진은 독립공채 발행과 독립의연금 수합, 세금 징수 등을 제안했다. 임시정부는 이를 시행해 재정 마련에 나서기도 했다.

[b]◆"세계 평화는 한국 독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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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의 단체 및 지역대표 372명의 명의로 태평양회의에 제출한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 자료/국회



2년 후 임시정부는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부임됐지만, 국무총리 이동휘 등을 비롯한 국무원과 갈등을 빚었다. 이동휘는 국무총리를 사퇴했고, 이승만도 하와이로 돌아간다. 김규식·안창호·노백린·남형우 등 국무원도 이어 사퇴했다.

무정부 상태를 수습한 건 임시의정원이었다. 이승만의 하와이 귀국 후 8차 회의에서 홍진은 제3대 의장에, 신규식은 법무총장에 선출됐다. 또 손정도(교통)·이희경(외무)·김인전(학무) 등이 국무원에 임명됐다. 홍진과 신규식 등은 책임자가 돼 혼란에 빠진 정부와 의정원을 수습하고 이끌어야 했다. 당시 국제 정세에 두 가지 변수가 나왔다. 한국독립운동에 우호적 입장이던 손문(孫文)이 중국 광동에서 호법정부 대총통이 됐고, 미국 워싱턴에선 태평양 회의를 연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홍진과 신규식은 이를 활용해 임시정부 활로를 모색하고자 했다. 신규식은 호법정부와 교섭을 맡았고, 홍진은 워싱턴 회의 참가를 계획했다.

홍진은 '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를 조직해 태평양 회의에서 한국독립 승인을 목표로 자금 마련에 나섰다. 또 '선전'이란 잡지를 발행해 국내외 각지에서 활동하는 단체와 국민이 일치한 행동을 할 것을 촉구했다. 임시의정원법은 주외대사나 대표를 파견할 경우 정부는 의정원 동의를 얻도록 했다. 정부는 이승만을 대표, 서재필을 부대표로 정하고 의정원에 동의를 요청했다. 홍진은 1921년 9월 25일 9차 임시의회를 열고 정부가 제출한 대표인선요구동의안을 통과시켰다.

홍진은 세계 각국 의회에 협조를 요청했다. '태평양 회의에 대한 한국독립청원서'를 작성해 "한국의 독립이 실현되지 않으면 세계평화는 기대할 수 없다"며 각국 의회에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각국 의회가 일본에 압력을 가해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태평양 회의 의장을 맡았던 미국 국무장관 찰스 에반스 휴즈는 일본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했다. 결국 태평양 회의에서는 한국 문제가 거론조차 되지 않은 채 끝났다.

[b]◆대한민국 의회정치의 기틀을 마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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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4월 홍진은 태평양 회의에 대한 책임으로 의장직에서 사퇴한다. 다만 3대 의장에 이어 17·20대 의장에도 추대돼 임시의정원을 이끌었다. 임시의정원 마지막 의장이자 최장 의장이었던 홍진은 1945년 12월 '임시의정원 문서'를 지니고 환국했다.

홍진은 1946년 9월 병환으로 타계한다. 장례식은 9월 13일 김구와 이승만을 비롯한 각계 인사가 운집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됐다.

1974년 홍진의 손자 홍석주는 의정원 문서 1536건을 국회에 기증했다. 문건은 '대한민국' 국호가 최초로 규정된 ▲대한민국 임시약헌(헌법)' 개정안 초안(1927년) ▲대한민국 건국강령(1941년) ▲광복군 작전보고(1945년) 등이었다. 임시정부 문서는 이 자료 말고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의정원 문서를 온전히 보존해 후대에 남긴 것 역시 홍진의 큰 공헌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오는 10일 국회는 미국에 살선 홍진 유족으로부터 임시의정원 관인(官印)을 받는다. 100년의 유랑을 끝내고 고국 품으로 돌아오는 관인은 가로·세로 5cm, 높이 6cm 크기로 '임시의정원인(臨時議政院印)'이라고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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