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깃을 세우는 겨울날 헌책방을 만나게 되면 까닭모를 허허로움이 사무친다. 낱장마다 누렇게 바랜 헌책들을 보라. 층층이 부둥켜 움켜잡고 나달나달 떨고 있는 자태가 처연하다. 그 자태에서 아픈 세월을 본다. 무서운 속도로 엄습해오는 첨단 디지털의 와류에 부대끼고, 또 싸워온 흔적이다. 쇠락하는 시간의 공간과 기억의 창고를 사수하려니 그랬을 것이다. 촌각을 다투며 얄팍한 지식만 사냥하는 변덕스런 사람들에 대한 서운함도 짙게 배어 있다.
동네 헌책방은 좁다란 골목길 안 으슥한 곳에 들어앉아 있다. 초대형 서점과 초스피드 인터넷 책방에 주눅 들어서일까. 쭈뼛거린다. 남세스러웠는지 간판조차 없다. 간판이랬자 골목 밖까지 등 떼밀려나와 켜켜이 키를 세운 덩치 큰 대백과사전이 대신하고 있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서성거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호객꾼이다. 추억의 헌책방이 겨우 숨 붙이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손짓한다. 불현 듯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골목 안쪽을 기웃거리게 된다.
누구든 헌책방 책시렁 앞에 서면 그 재촉하던 걸음이 이상하리만치 느림보가 된다. 보물찾기라도 하듯 설렘도 생긴다. 헌책방의 묘한 마력이다. 숨결을 느끼려 더듬거려본다. 겨울날의 책들은 그러나 잔뜩 굳어 있다. 풀풀거리던 해묵은 먼지도 얼어붙었다. 그 꽁꽁 얼어붙은 책갈피에서 절규를 듣는다. 제발 구시대의 고물로 평가하지 말라! 아우성친다. 시대가 첨단화될수록 유물에 내제된 고부가가치의 지혜가 언젠가 빛을 발할 거라면서.
헌책방엔 없는 책이 없다. 참고서며, 교양도서며, 전집류며 눈 밝은 사람들은 반짝거리는 보물을 캔다. 줄을 서서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풍경은 사라졌어도 수많은 활자들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살가운 체온도 느껴진다. 다들 베스트셀러를 꿈꿨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구절구절 그 고통의 흔적이 읽힌다. 저마다 사연이 있고, 모진 삶이 묻어난다. 혹자는 왜 헌책방에 들려면 인간적이 된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헌책방이라 해서 과거만 있는 게 아니다. 현재, 미래가 호흡한다. 그 격변의 세월과 공존하고, 공명하는 것이다. 때론 성찰의 시간을 갖게도 한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을 붙드는 헌책방의 끈질긴 생명력이다. 책방 주인아저씨는 우리 동네 도서관 관장이다. 널브러진 헌책 더미 속에 어떤 보물이 꼭꼭 숨어 있는지 꿰차고 있어서다. 손님들이 찾는 책을 귀신같이 단방에 뽑아내 먼지를 툴툴 털어낸다.
손때 묻은 책은 늘 체온이 느껴진다. 그 누군가의 체온이다. 책을 읽다 밑줄을 그은 대목에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와 나의 삶이 겹쳐지는 것이다. 이심전심이랄까. 책에는 마음이 담겨 있다. 연인들은 그런 마음을 전하려 책을 선물하는 것이다. 응축된 시집이 연인 선물 1호가 된 까닭이다. 시구절을 통해 사무치는 사랑을 투영하고, 그 간절한 사연을 연인과 어깨를 맞대고 울음을 삼키고 싶은 것이다.
책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끈이다. 그런 책을 쌓아둔 책방은 그래서 만남의 명소가 됐다. 교보서적이 그 명소이고, 한 때 종로서적이 그랬다. 그 종로서적이 종로타워에서 부활했다니 감회가 새롭다. 동네 헌책방에도 만남은 있다. 동서고금 많은 사람들을 불러낼 수 있다. 몸을 움츠리게 하는 이 겨울 헌책방에 들려 책시렁에 잠자고 있는 위인들을 깨워 겨울이야기를 나눠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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