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외환위기 당시 시민들은 금반지와 목걸이를 들고 거리로 나왔다. 나라가 살아야 나도 산다는 믿음이 있었다.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고이 간직해오던 금붙이들을 내놓았다. 지금 돌아보면 낯설 정도로 집단적이다.
기업 현장도 다르지 않았다. 삼성전자의 경우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연구원들은 도면을 펼쳐놓고 밤새 회의를 했고, 1995년에는 불량 휴대폰 15만 대를 공장 마당에서 불태웠다. 회사가 무너지면 내 삶도 흔들린다고 믿던 시대였다.
그 편이 합리적이었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임금은 가파르게 상승했다. 회사가 성장하면 월급이 올랐고, 월급이 오르면 집을 살 수 있었다. 함께 성장한다는 말은 구호가 아니라 경험이었다. 지금 세대는 그 경험을 갖지 못했다.
과거 세대는 가난을 두려워했지만 지금 세대는 탈락을 두려워한다. 이 차이는 세대 감수성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구조와 자산 환경의 변화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서울 아파트값은 46주 연속 올랐고, 2025년 누적 상승률은 8.25%로 2012년 이후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송파구는 20% 이상 뛰었다. 예전엔 월급이 집값을 따라갔지만 지금은 집값이 월급을 앞질러 달아난다. 1990년대 직장인은 야근 끝에 내 집 마련을 상상했지만 지금 직장인은 야근 끝에 전세 계약 연장을 걱정한다.
노동만으로 계층 상승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희미해지면서, 사람들은 회사를 공동체보다 현금 창출 수단으로 보기 시작했다. 부동산이 어려워지자 주식시장으로 향했지만, 주식 역시 시드머니가 있는 사람이 유리한 게임이었다. 자산이 자산을 낳는 구조 속에서 문이 하나씩 닫힐 때마다 사람들은 남은 문으로 몰렸다. 그 마지막 문 가운데 하나가 성과급이다.
예전의 성과급이 "잘했다"는 보상이었다면, 지금의 성과급은 자산시장 진입을 위한 종잣돈이다. 반도체 호황기 성과급 규모가 알려질 때마다 부동산 커뮤니티와 호가가 들썩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누군가는 그 돈으로 서울 입성 계산기를 두드리고, 누군가는 같은 대기업에 다니면서도 평생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삼성이라서 특별한 것도 아니다.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드러났을 뿐이다. 주거·교육·노후 부담이 개인에게 집중되고 자산 격차를 노동소득으로 만회하기 어려운 구조 속에서 한국의 노사 갈등이 해외보다 격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성장의 과실이 자산시장으로 먼저 흘러가는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성과급에 더 집착할 수밖에 없고 기업은 이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회사가 크면 함께 좋아진다"는 믿음이 사라진 자리에서, 노사는 공동체가 아니라 제한된 몫을 나눠 가져야 하는 상대가 됐다.
금모으기 운동 시절과 지금의 가장 큰 차이는 애국심의 크기가 아니다. 함께 버티면 함께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의 존재 여부다. 그 믿음이 살아있던 시대에는 사람들도 회사를 믿었다. 지금은 그 믿음이 합리적이지 않은 사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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