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내란 사태가 일어난 지 1년쯤 지났을 때다. 경제 관료 출신으로 장관을 역임한 A씨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한 선배 때문에 관료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고 했다. 그는 "정말 뼈아픈 것은 지금이 아니라 앞으로다. 후배들의 앞날이 더 걱정이다"라고 한숨을 쉬었다.
그가 말한 '한 선배'는 한덕수 전 국무총리다. 공무원 사회에서 한 전 총리는 신화적인 존재였다. 통상산업부 차관, 재경부 장관, 국무총리를 거쳐 다시 한번 총리직에 올랐다. '관료로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봉'을 정복한 인물이다. A씨는 "관료로서 명예와 정점을 모두 누린 사람이 무엇이 아쉬워서, 정의롭지 않은 길에 동조하고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미워도 선배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 일로 인해 후배들이 받은 상처는 아물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행정고시 출신 후배들의 앞날이 캄캄하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가 우려한 것은 공무원의 사기 저하와 함께 관료에 대한 신뢰 붕괴다.
공무원은 대한민국 사회를 움직인다. 그들은 정치 격랑 속에서도 "정권은 유한해도 국가와 정책은 영원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전직 장관 A씨가 한탄한 후배들의 '캄캄한 앞날' 역시 이 자부심의 붕괴를 걱정한 것이다.
현실은 차갑고 '냉정'하다. 이재명정부 출범 이후 단행되는 주요 기관 인사에선 관료에 대한 깊은 불신과 경계심이 묻어난다. 관료 세력에 더이상 국정의 파트너 자리를 내어주지 않겠다는 의중이 읽힌다. 변호사 출신의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이 신호탄이었다. 지난 19일 마감한 여신금융협회 차기 회장 공모 결과 관료 출신은 한 명도 지원하지 않았다. 과거 여신금융협회장은 금융위원회 출신의 관료가 퇴임 후 거쳐 가는 코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여의도 금융가와 관가 안팎에선 이미 공모 전부터 청와대 라인을 통해 "관료 출신은 지원 조차 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전달됐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괜히 지원했다가 '눈치 없는 구태 관료'로 찍혀 낙마하느니 아예 몸을 사리는 분위기"라고 했다.
관료 불신으로 초래된 인사 절벽은 하반기 금융권을 더 거세게 몰아칠 전망이다. 당장 오는 12월에는 금융권의 큰 축을 담당하는 이병래 손해보험협회장과 김철주 생명보험협회장의 임기가 만료된다. 두 사람 모두 금융위, 기획재정부 등을 거친 정통 엘리트 경제 관료 출신이다.
통상 임기 몇 개월 전부터 차기 회장 자리를 두고 하마평이 무성해지며 논의가 활발해진다. 금융위나 재정경제부 출신의 관료가 일찌감치 출사표를 던지고 물밑 작업을 벌인다. 하지만 올해는 다른 기류가 예상된다. 금융권의 한 고위 관계자는 "그동안 보험협회장 자리는 관료 출신들의 전유물이자 요직 중의 요직이었지만, 지금은 감히 쳐다보기조차 힘든 자리가 됐다"고 귀띔했다.
정부의 '관료 배제 스탠스'가 확실해지면서, 올 연말 차기 보험 관련 협회장은 과거의 공식이 깨질 개연성이 크다. 관료 출신 배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교차한다. 정책 경험이 풍부한 관료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시각도 여전하다. 금융당국과 시장의 '소통 불통'도 우려한다. 하지만 다른 시각도 있다. 관료든 민간이든 능력있는 사람이 임명되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는 목소리다.
"선배의 과오로 후배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전직 장관. 실제로 '관료의 몰락'을 마주하고 있다. 관료 사회가 스스로를 개혁하지 못해 마주한 현실이다. '욕심 많고, 영혼 없는 관료'가 사라져야 다시 명예와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금융부장 bluesky3@metr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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