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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예술과 ‘집’

홍경한(미술평론가)



'집'은 사회 공동체의 기초단위로써, 몸과 마음의 쉼터라는 본래의 기능을 넘어 도시의 특질을 배양하는 공공 오브제이다. 동일한 사회문화적 문맥 내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다양성과 맥락을 담는 기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집은 너와 다른 지위와 신분을 나타내는 기준이면서 '부(富)의 차별화'를 위한 수단으로 존재한다. 물론 도시의 팽창과 물질화의 상징이자, 자발적 고립의 판옵티콘(Panopticon)의 세계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특히 빈부격차 및 인간성의 상실을 대리하는 기호인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에게 집은 어떤 의미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술가들에게 집은 미적 가능성을 덧칠할 수 있는 캔버스이면서 당대 현안을 소환하는 비판적 촉매이다. 정치적·사회적 배경 아래 벌어지는 인간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이고, 인류 공통의 이슈를 확장시키기 위한 방법에 있어서도 집은 중요한 요소이다.

실제로 집을 단지 거주의 개념이 아닌, 폭넓은 관점으로 해석하는 작가는 드물지 않다. 일례로 예루살렘 서안 출신의 예술가인 '에밀리 자키르'는 1948년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사라진 팔레스타인의 418개 마을을 기억하자며 집(마을)을 등진 이들의 이름을 적은 텐트를 설치했다. 2017년 카셀도큐멘타의 한 전시장에 선보인 이 작품은 사상과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 앞에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 집과 함께 사라진 가족들의 이름을 새긴 일종의 묘비명이다.

중국 작가 '아이웨이웨이'의 '유랑하는 사람들'(2017)은 공산주의 정권으로부터 추방당한 예술가인 작가의 시각에서 난민과 이주민을 향한 공감과 연민을 녹여낸 작품이다. 특정한 정치적 상황을 말하기보단 인간이 처한 '새로운 난민의 조건'을 설명하는데 긴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는 게 특징이다.

이외에도 예술가들은 집이라는 명사를 통해 다양한 현실의 비극을 언급한다. 시리아 난민 소년이 익사한 레스보스 섬의 두 동강 난 나무배와 노로 만든 설치작품으로 정치적·사회적 박해와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인간을 묘사한 멕시코 작가 '기예르모 갈린도'를 비롯해 임시 거주형 콘크리트관 20개를 차곡차곡 쌓아 후기자본주의사회가 만든 위기를 표현한 이라크 출신 쿠르드족 작가 '히와 케이'의 설치작품 '우리가 숨을 내쉴 때' 등이 그렇다.

특히 지난 2011년 쓰나미 피해를 입은 후쿠시마 인근 주민들이 방사능 오염물질을 피해 정든 집을 떠나 피난길에 오른 일본인들의 상황을 '후쿠시마 산책'(2018)이라는 제목의 작품에 담은 콜렉티브 그룹 '돈트 팔로우 더 윈드', 삶의 질조차 값으로 매겨지는 당대 구조를 비판하는 육효진의 '쪽방 프로젝트' 역시 동시대 인류사에서 기억해야 할 사회문제를 집과의 관계로 다룬 작업에 해당된다.

이들의 작업은 떠도는 이들과 집을 연계한 작업인 '마이클 윈터바텀'의 영상 '인 디스 월드'(2002)처럼 동시대 인류의 가슴 아픈 현재의 역사를 보여주며 집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류의 상처와 아픔을 관조의 대상으로 삼는 현재를 통찰한다. 실종된 것이 단지 집이라는 장소 혹은 공간만은 아니라는 것을 독백처럼 내뱉는다.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여전히 우리 주변엔 한두 평 남짓한 공간에서 희미한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틈에서 무언가를 잃은 채 부유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다양한 문제의식을 시각화하며 현실에 개입하는 예술의 혁혁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나와 다른 환경에 처한 이들에 대한 공감도가 그리 높진 않기 때문이다. 단지 집만 놓고 보더라도 말이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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