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100주년]3.1운동 이후 독립군 및 광복군은 어떻게 싸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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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100주년]3.1운동 이후 독립군 및 광복군은 어떻게 싸웠나

최종수정 : 2019-05-26 11:43:19

[임시정부100주년]3.1운동 이후 독립군 및 광복군은 어떻게 싸웠나-(상)항일무장투쟁에서 광복까지 군인 양성

육군과 육군사관학교는 광복이후인 1946년 1월 창설된 국방경비대와 같은 해 5월 개교한 국방경비대사관학교를 각각 모체로 인식해왔다. 반면, 독립군과 광복군의 지위나 역할 승계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그렇지만 지난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은 국방부 업무보고에서 "광복군 역사를 국군 역사로 편입시키는 문제를 검토해달라"고 말하면서 상황은 변했다. 군 당국은 국군의 역사를 광복군과 연계시키는 시도를 하고 있다.

■항일무장투쟁, 계보적 계승보다 현대적 재해석이 중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육군과 육사가 펼치는 민족 얼찾기는 환영을 받았지만,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계보적 승계만을 강조하는 것은 빙하기에 멸종한 '매머드'가 '코끼리'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격"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실제 코끼리의 조상은 멸종한 매머드가 아닌 신생대 마이오세와 플라이오세 때 생존했던 '프리멜레파스'다. 한 전사학자는 "항일무장투쟁정신의 승계는 중요하지만, 선조들이 어떤 삶을 살았고 무엇을 배우고 전하려 했는지를 복원하지 않고 계보적인 승계만을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육군과 육사는 각각 뮤지컬 신흥무관학교 공연과 특별학술대회 등 항일무장투쟁 정신 승계를 위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2017년 12월 육사는 육군과 육군사관학교의 역사가 독립군·광복군에서 유래됐다는 취지의 특별학술대회를 열기도 했다. 육군은 2018년 9월에는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을 시작으로 1920년 만주에서 독립군 양성기관 역할을 한 신흥무관학교를 배경으로 뮤지컬 '신흥무관학교'를 공연해 왔다.

2017년 특별학술대회 발제자들과 토론자들 사이에서는 "우리 군의 다수가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었지만 건군 당시 수뇌는 광복군이 이끌어야 한다는 공동인식이 있었다"며 "중국에 주둔했던 일본군과 만주군 내의 조선인도 광복군에 흡수됐기 때문에 광복군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현대사적 의미에서의 재해석과 근거를 제시하기 위한 문헌 고찰 등은 미흡했고, '광복군은 한국군의 뿌리'라는 당위적이고 감정적인 접근이 주류를 이뤘다.

이론적·논리적 근거가 뒷받침 필요한 만큼, 항일무장투쟁의 맥을 짚어보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에 들어선 것이다.

육군이 주최 및 주관하는 창작 뮤지컬 신흥무관학교의 포스터
▲ 육군이 주최 및 주관하는 창작 뮤지컬 신흥무관학교의 포스터

■항일무장투쟁의 근간이 된 신흥무관학교

1910년 일본에 의한 강제병합으로, 한반도 내에서의 무장투쟁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게 됐지만, 1919년 3.1운동은 국외 항일무장투쟁에 기폭제가 됐다.

그 중 핵심이 근간이었던 곳을 꼽으라면 단연 신흥무관학교다.

1911년 중국 지린성 부근에 신흥강습소로 시작된 신흥무관학교는, 1907년 일제가 반일적 색체를 띠는 계몽운동을 탄압하자 안창호를 비롯한 신민회는 1910년

무장투쟁운동을 공식 노선으로 선택하게 됐다.

이들은 1910년 12월부터 서간도로 이주를 시작했다.1911년 5월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조직해,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3.1운동 이후 독립에 대한 열망을 품은 채 전국 각지에서 많은 청년들이 찾아오면서 신흥무관학교의 세력은 점점 커지게 된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까지 약 20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생도들은 총검술, 의료, 일본과 중국의 병서를 기초로한 병법등 군사학을 배웠다. 오늘날 사관학교처럼 국어, 국사, 지리 등 민족의 얼을 깨우치기 위한 일반학도 교유받았다.

생도들의 교육을 혁신한데는 후일 광복군 사령관으로 임명돼, 중국 국민당 정부와 항일전을 이어간 지청천 장군이었다. 그는 대한제국 무관학교 생도로 교육을 받던 중, 통감부의 압력으로 1909년 대한제국 군부 폐지와 함께 무관학교가 폐교되자 일본육사에서 위탁교육을 받았다.

1914년 일본 육사 26기로 졸업한 지청천 장군은 1919년 평소 마음먹은 바를 실현하고자 일본군 중위신분에서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이 돼,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그는 일본군에서 탈주 할 때,일본군의 교범과군용지도를 챙겨나왔다. 정규 군사교육을 받은 지청천 장군은 신흥무관학교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흥무관학교의 생명은 길지 않았다. 1920년 5월 일본군의 토벌작전이 시작되면서 같은해 7월 폐교하게 된 것이다.

신흥무관학교는 출신자들은 서로군정서와 같은 소규모로 활동하던 군정부(軍政府)들에 흘러 들어갔다.

훈련을 마친 광복군 제2지대 대원들이 공작임무를 띠고 과업완수를 위해 선서하는모습.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훈련을 마친 광복군 제2지대 대원들이 공작임무를 띠고 과업완수를 위해 선서하는모습.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

■신흥무관학교 광복군으로 맥을 잇다

신흥무관 교성대장 지청천은 1940년 9월 17일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총사령으로 임명됐다. 3개의 지대로 편성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의 훈련과 교육은 전적으로 중화민국(국민당 정부)에 의존했다.

국민당 정부의 총통 장제스의 부인인 쑹메이링이 이끄는 부녀위로총회에서 중국돈 10만원을 기부하기도 했다.김구의 노력으로 군 통수권이 1945년 회복되기 까지 광복군 간부 육성은 국민당 정부와 외국에 의존했다.

그렇지만 광복군이 자체적인 군사교육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국청년훈련반(韓國靑年訓練班)·한국광복군훈련반(韓國光復軍訓練班)을 설치해, 한인 청년들에게 일정한 기간 동안 군사 훈련을 받게한 후, 광복군으로 편입시켰다.

1943년 한국 광복군의 일부 대원은 영국군에 파견되어 인도·버마 전선에서 연합 작전을 전개했고, 일본에 강제징집된 학병 50명이 1945년 1월 광복군에 편입했다. 이들 중 일부는 미국전략사무국(OSS)으로부터 특수 공작 훈련을 받았고 8월 4일 3개월 과정의 훈련을 마친 제1기생으로 배출됐다.

1기생들은 국내에 침투해, 국내진공작전을 실시할 예정이었지만,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무산됐다. 1946년 6월 광복군은 해체됐지만, 귀국한 광복군의 일부는 대한민국 국군으로 복무해 명맥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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