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 100주년 메트로의 눈] 현장르포-부산에 울려퍼진 '대한독립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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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100주년 메트로의 눈] 현장르포-부산에 울려퍼진 '대한독립만세'

최종수정 : 2019-02-27 15:14:38

부산 좌천동 골목에 그려진 벽화. 손엄지 기자
▲ 부산 좌천동 골목에 그려진 벽화./손엄지 기자

-부산에 새겨진 여성 독립운동의 발자취

대한민국의 광복(光復)은 일본의 패전(敗戰)으로 얻게 된 어부지리가 아니다. 일제치하 시절에도 밤 불빛을 밝혀 대한민국의 독립을 염원했던 선조들의 끈질김이 없었다면 광복은 그렇게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부산 좌천동에 위치한 일신여학교는 부산의 3.1운동 진원지로 알려진다. 손엄지 기자
▲ 부산 좌천동에 위치한 일신여학교는 부산의 3.1운동 진원지로 알려진다./손엄지 기자

어느 한 사건이 광복을 이뤄냈다고 할 순 없지만 분명한 시발(始發)점은 있다. 바로 1919년 3·1 만세운동이다. 이후 일본군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하지만 국민들은 더 강해졌다. 일본군은 우리 국민을 무자비하게 교도소에 잡아넣고 심한 고문을 일삼았다. 더 이상 수용할 교도소가 없을 정도로 독립운동가들이 밀려들었다.

일신여학교 입구. 손엄지 기자
▲ 일신여학교 입구./손엄지 기자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의 열기는 전국으로 퍼졌고, 부산은 3월 11일에야 만세 삼창이 거리에 울려퍼졌다. 첫 시작은 일신여학교 여학생들이었다. 여성의 재능과 능력을 꽃피울 수 없는 불운한 시대에서도 일제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운 이들의 활약은 널리 기록됐다. 3·1 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여성 독립운동의 역사를 걷기 위해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 시민들이 만세운동을 벌인 골목 벽에는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발표한 기미독립선언서가 쓰여져 있다. 손엄지 기자
▲ 부산 시민들이 만세운동을 벌인 골목 벽에는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발표한 기미독립선언서가 쓰여져 있다./손엄지 기자

27일 부산 좌천동에 위치한 일신여학교로 걸어가는 길목에는 3·1 운동의 시발점이라는 자부심이 곳곳에서 묻어났다. 일제의 총칼에 맞서는 여학생들의 만세운동, 3·1운동을 촉발한 기미독립선언서, 독립운동가들의 이력과 사진이 골목 벽을 빼곡이 채웠다.

당시 3·1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김반수(당시 16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3월 1일에 독립만세를 전국에서 부른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해 때는 이때다 싶어 동지 일신여학교 몇 명이 모여 태극기를 만들어 나눠주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님께서 출가시킬 때 쓰려고 장만해 둔 혼숫감 옥양목을 어머님 몰래 꺼내 기숙사로 가지고 갔습니다. 창문에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창문에 이불을 가리고 옥양목에다 대접을 엎어서 동그라미를 그리고 붉은물 검은물로 칠하여 겨우 마련한 태극기를 들고, 3월 11일 밤 8시경 거리에 나온 사람들에게 나눠주어 목이 터지도록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답니다."

이후 일신여학교 2명의 교사들과 11명의 학생들은 만세시위의 주모자로 몰려 부산교도소에 수감됐다. 교사들은 징역 1년 6개월형을, 학생들은 징역 6월형을 선고받는다.

당시 일본 경찰은 주모자를 자백하라며 모진 고문을 서슴지 않았다. 어린 여학생들에게 모욕감을 안기기도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주동인물은 없으며 우리가 모두 주동인물"이라고 맞섰다. 고등과 4학년 김응수는 "세 살 먹은 아이도 제 밥을 빼앗으면 달라고 운다. 우리가 우리나라를 돌려달라고 시위하는데 무엇이 나쁘냐"고 되물었다. 일신여학교 학생들의 용맹함은 동래학원 100년사에 기록됐다.

동래고등학교 바로 옆 골목에는 복원된 박차정 의사의 생가가 위치해있다. 손엄지 기자
▲ 동래고등학교 바로 옆 골목에는 복원된 박차정 의사의 생가가 위치해있다./손엄지 기자

이날 오후 부산 동래구 골목 깊숙이 자리해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 의사의 생가를 찾았다. 박차정 의사는 유관순 열사에 이어 두 번째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은 여성독립운동가다.

영화 '암살'에서 김구 선생은 김원봉에게 "결혼식에 못 가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 결혼식이 바로 김원봉 선생과 박차정 의사의 결혼식이었다. 박차정 의사는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결혼해 의열단 핵심 단원으로 활동했다.

실제 박차정 의사는 '암살'의 여주인공 처럼 목숨을 바쳐 항일운동을 벌였다. 그가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34살의 나이로 안타깝게 숨을 거둔 이유도 1930년 1월 서울지역 11개 여학교의 시위투쟁인 이른바 '근우회사건'의 배후자로 검거돼 서대문 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받은데다 1939년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서 입은 부상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해설사는 "현재 건물은 2005년도에 복원했으나 박차정 의사의 생활상을 담은 사진을 찾지 못해 완벽한 복원은 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복원의 정확성은 중요치않다. 박차정 의사의 흔적이 100년이 지난 뒤에도 남아있다는 것이 큰 의미다.

1919년 3월 13일 동래고보 현 동래고등학교 학생들이 만세시위를 벌인 골목. 손엄지 기자
▲ 1919년 3월 13일 동래고보(현 동래고등학교)학생들이 만세시위를 벌인 골목./손엄지 기자

한편 3·1운동 100주년인 올해 부산의 지방자치단체들은 100년 전 남녀 학생들의 자랑스러운 만세시위를 기념하는 행사를 진행한다.

동래구는 3월 1일 동래고보의 후신인 동래고에서 기념식을 갖고 동래고→박차정 의사 생가→수안인정시장→동래시장 앞 만세거리→구청광장에서 만세운동 행진을 벌일 예정이다. 이어 동구는 부산·경남 만세운동의 효시가 된 일신여학교 만세운동 거사일인 3월 11일 국가보훈처와 함께 독립의 횃불 봉송 행사를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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