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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회일반

[난 멈추지 않는다] ⑦ "뿌리깊은 꿈은 흔들리지 않아요" 나무 위의 피터팬, 미즈노 마사유키

트리 하우스는 사방에 뻗은 나뭇가지와 조화를 이룬다. 방바닥에서 뻗어나온 가지가 창문과 지붕을 지탱하고 있다./이범종 기자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대동리는 어린이날이 필요 없다. 찾는 사람 누구나 소년이 되는 느티나무 집(트리 하우스) 때문이다. 200여년 마을을 지켜온 당산나무는 미즈노 마사유키(50) 씨의 손길을 타고 마을 명소가 됐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살아있는 액자로 사계절을 내려다본다. 5년 전 미즈노 씨가 나무 위에 창문을 달고 지붕도 얹은 덕분이다. 도시에서 분투하던 중년의 가장이 '대동리 피터팬'이 된 사연을 듣기 위해 어린이날 다음날인 6일 그의 집을 찾았다.

미즈노 씨는 "동경은 뿌리가 없어서 한 번 자르면 나중에 '그런 때가 있었지'라고 말하지만, 꿈은 뿌리가 있기 때문에 결국 다시 자라게 된다"고 말했다./이범종 기자



◆돈이 곧 행복인 줄 알았다

"다음에 올 때는 달라질 거예요!" 드립커피를 내리던 미즈노 씨는 집을 나서는 방문객의 기억 언저리에 인삿말을 새겼다. 이 집의 가훈은 '우리집은 항상 공사중. 행복도 성공도 공사중'이다. 대문 역할을 하는 트리 하우스와 긴 마당을 사이에 둔 주택. 미즈노 씨에게 이 공간은 살아 움직이는 땅, 네버랜드다.

미즈노 씨의 행복 공사는 그의 인생이 대한해협의 파도처럼 수차례 철썩인 뒤에야 시작됐다. 홋카이도 삿포로가 고향인 그는 1993년 같은 종교를 가진 한국인 아내와 결혼해 경기도 광주에서 5년 동안 살았다. 1998년 다시 찾은 고국 땅은 외환위기에 직면한 한국처럼 사정이 안 좋았다. "30살이 넘어 돌아와 보니, 특별한 능력이 없어 파칭코 가게에서 일했어요. 갖은 고생 끝에 캐드(CAD) 자격을 얻어 중견 건축회사에 들어갔지요."

곧이어 은행 대출로 아파트를 샀다. 남들이 좋다고 여기는 삶에 충실했다. "손으로 그려진 도면을 디지털화하는 작업이 일주일 걸린다고 할 때, 우리 회사는 3~4일 만에 해내서 업계에서 인기가 높았어요. 직원들이 매일 야근에 시달린 대가였죠."

아내와의 대화는 끊기고, 아이들의 얼굴도 볼 수 없게 됐다. "그런데 돈은 생기니까, 이것이 행복인 줄 알았어요."

미즈노 씨 집 마당에서 찍은 파노라마. 트리 하우스 옆으로 개와 닭장이 보인다./이범종 기자



◆후크 선장 갈고리같은 세상…한때 극단적 생각도

입사 2년 뒤인 2000년 봄. 도망갔던 피터팬의 그림자가 창문을 두드렸다. "책상 옆 창문 너머 길가에 민들레가 피어있었어요. 그때 알았죠. '봄이 왔었구나.' 흰 나비가 날아와 앉더군요. 어린 시절 고향에서 쫓아다닌 그 나비가."

그때 만일 회사 밖을 나가 민들레를 바라보았다면 부장이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뒤통수가 저릿했다.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목줄이 있구나. 이렇게 살기는 싫다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하지만 쌓아둔 재산은 커녕 그럴싸한 사업 계획도 없었다. 부정적인 마음에 휩싸인 채 하루하루 무거운 넥타이를 목에 둘렀다. "갑자기 몸이 이상했어요. 기침에 열이 나고, 약 먹어도 낫질 않아요. 프로젝트 끝날 무렵 병원에 갔더니 결핵이라더군요."

미즈노씨네 트리하우스 입구./이범종 기자



병을 이유로 해고당한 그의 자존심은 후크 선장의 갈고리 같은 현실에 무참히 찢겨졌다. 신기루 같은 인맥은 명함과 함께 사라졌다. 아이는 둘, 아내는 우울증. 본인도 폐인이 되었다. "계속 안 좋은 일이 일어났어요. 심지어 장모님께서 병으로 돌아가셔서 아내가 한국으로 떠났어요." 미즈노 씨 가족은 경기도 수원에서 분식집을 하던 장모의 집에 도망치듯 달려왔다. 삶에 대한 의욕이 꺾였다. "아이들이 당시 생소하던 비데 있는 아파트에 살다가, 화장실도 없고 바퀴벌레 나오는 집에 온 겁니다. 부부싸움도 잦았죠."

재개발을 앞두고 관리되지 않는 아파트 4층에 짐을 푼 뒤에는, 온 가족이 몸 던져 목숨을 끊자는 이야기도 오갔다. 온 나라가 월드컵의 열기에 들썩이던 2002년 여름이었다.

"죽음을 가리키는 한국말에 '돌아가신다'는 표현이 있잖아요. 그때 나는 여기서 죽으면 돌아가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도 멋지게 살고 싶고 하고픈 일도 많았는데 이렇게 끝나는건가. 나, 이대로는 못 죽는다."

아내를 부둥켜안고 눈물 흘린 미즈노 씨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을 끝내기로 했다.

사다리를 타고 트리하우스에 올라가면, 영화 속에 나올법한 풍경이 펼쳐진다. 나무가 곧 기둥이고 지붕이 된다./이범종 기자



◆동경 아닌 꿈을 꾸면, 기회가 온다

미즈노 씨 가족이 위기에 몰린 2002년. 한국팀 응원 구호는 '꿈☆은 이루어진다'였다. "생각보다 꿈과 동경을 헷갈리기 쉬워요. 그런데 저는 그때 꿈이 '만들기'라고 느꼈어요. 옛날의 나였으면 참고 돈 모아서 나중에 하자고 했겠지만, 이젠 더 잃을 것이 없었어요."

그렇게 마음먹자, 일이 풀리기 시작했다. 2003년부터 일본 애완동물 업체의 한국 주재 프리랜서로 일하게 됐다. 고정 수입이 생긴 것이다. 2004년 장모님이 살던 집을 찾아 김제로 향했다. 버려진 물건들로 집을 꾸몄다. 사람들의 시선은 잊은 지 오래였다.

미즈노 씨의 존재를 알게 된 프로덕션은 그를 일본 코디로 불렀다. 이후 2011년 11월 도쿄 출장길에 오른 미즈노 씨는 잊고 지낸 자신의 그림자를 거리에서 마주쳤다. "카사(CASA)라는 건축 잡지의 트리 하우스 특집이 서점에 진열돼 있었어요. 설렜습니다." 2009년 60년 된 폐가로 이사한 지 2년 만에, 집 앞에 놓인 당산나무가 달리 보였다.

동경과 꿈의 갈림길에서 미즈노 씨는 '객관적인 나'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40대 중반에 아이가 다섯. 그 중에 대학생도 있어요. 그럼 어떻게 하죠? 무지하게 일 해야 돼요."

그로부터 2년 뒤. 함께 일하는 PD가 '인간에게 만들기란 무엇일까'를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키로 했다. "잡지에서 읽은 트리 하우스의 대가, 고바야시 타카시 선생님이 떠올랐어요. 만나고 싶었지만 '객관적인 나'는 그렇게 해 봐야 안 된다며 말렸죠."

그때 PD가 입을 열었다. '일본에서 나무 위에 집 짓는 사람이 있다는데, 섭외해 주세요.'

꿈만 같던 고바야시 씨와의 만남에서 현재를 즐기는 그의 모습을 마주했다. 이후 방송은 나무집 만들기로 가닥이 잡혔다. 물론 미즈노 씨의 나무집도 포함됐다. 2013년 여름에 시작된 트리 하우스 건설은 반 년 만에 마무리됐다.

당산나무의 변신이 가능했던 이유는 마을 사람들의 격려였다. "2009년 겨울에 집을 옮기고 보니, 쓰레기더미에 둘러싸인 당산나무가 외로워 보였어요. 낡은 자전거에서 비료 포대까지. 하나하나 치우기 시작했지요." 마을회관이 생기면서 버려진 당산나무를 정성으로 보살핀 그에게, 어르신들은 트리 하우스 건축을 응원해주었다.

이후 '미즈노씨네 트리하우스'는 지역 명물이 됐다. 감탄을 내뱉으며 나무에 오르는 누구나 팅커벨이 된다. 피터팬이 된다.

"마음 먹으면 이렇게 살 수 있어요. 그런데 아내가 허락 안 하면 못해!" 6일 오후 미즈노 씨가 손님들과 차를 마시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이범종 기자



◆"나의 꿈은 웃음 가득 네버랜드"

나무집은 어째서 동경이 아닌 꿈이라는 확신이 들었을까. 미즈노 씨는 '뿌리'에 답이 있다고 말했다. "일단 계속 부정하고 보는 거예요. 동경은 한 번 자르면 안 자라나요. 시간이 지나면 '그럴 때가 있었어' 하죠. 뿌리가 있어 계속 자라면 꿈인데, 다른 사람들 말에 흔들리지 않고 나를 믿어야 해요. 그럼 운이 다가옵니다."

무엇보다 그의 꿈을 현실로 이끌어준 이들은 웬디와 다섯 아이들이다. 피터팬을 사랑하는 웬디의 마음으로, 그의 아내는 잃어버린 꿈의 그림자를 발에 꿰매 주었다. 2년 전, 일본 회사 직원들이 느낀 위화감을 염려한 그의 사직도 이해해주었다.

지금 미즈노 씨네 집은 체험학습장으로 등록돼 있다. 닭장에는 닭들이, 부화기엔 계란과 메추리알이 있다. 거실은 카페로, 남는 방 한 칸은 사랑방으로 쓴다.

"저는 아파트 세대여서, 고향집에 대한 추억이 없어요. 거실 바닥 상처에 사연이 없고, 벽에 그어진 키도 없지요. 저는 아이들에게 그런 집을 선물하고 싶었어요. 작고 오래되고, 늘 그 자리에 있는 집."

그의 바람대로, 아이들은 네버랜드가 자랑거리다. 대학생인 첫째와 둘째는 이달 연휴에 각각 친구 10여명을 데려오겠다고 해, 일정을 조율해야 할 판이다.

"젊었을 때 꿈은 '세계 평화'였는데, 살다 보니 그 조건은 가정의 평화였어요. 이 집은 저와 같아요. 집을 계속 만지는 이유는, 내 안에 있는 가족 사랑을 보듬기 위해서지요. 제 꿈은 계속 내 방식대로 이 집을 꾸며가는 삶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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