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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홍경한의 시시일각] 페이스북을 삭제했다

홍경한 미술평론가



최근 페이스북을 삭제했다. 아주 오랜 시간 운영해온 정보와 소통의 창구였지만, 문득 진정한 의미에서의 나와는 지나치게 거리가 있다는 느낌이 컸고, 누군가에게 혹시 모를 오해와 상처, 아픈 기억을 생산할 수도 있는 무대라는 판단에 계정을 없앴다.

특히 그 상처와 오해, 아픈 기억들을 숱하게 내뱉는 타인의 경험들도 내겐 또 다른 상처와 아픔이자 경험이었다. 그 경험의 사례들을 감당하기 버거움은 페이스북을 접는데 작지 않은 계기가 됐다.

페이스북을 하지 않자, 이미 주어졌으나 알 수 없던 시간을 되찾았다. 나를 응시하는 기회도 발견했다. 나와 사회 간 인식과 의식의 무게가 다를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은 덤이다.

누구나 그렇듯 '세상'에 존재하는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내가 아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하나의 '상징'일 뿐, 내가 나를 이해하고 있는 것만큼 진실된 나의 참모습과 사회 속 나와의 사이엔 분명한 거리가 있다.

그런 점에선 우리가 일평생 수없이 부르게 되는 이름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례로, 인칭명사 A는 '실재의 A'와 깊은 관계가 없다. 그것은 단지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 사물이나 현상 따위에 붙여진 '기호'이지 본질적 인간으로서의 A, 개인 고유의 정체성을 지닌 A를 내포하진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서 A는 실재 A가 아니라 세상에 기호를 등록시킨 A로서만 존재하고 통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호화된 A는 실재 A가 결핍된 A, 상징을 획득하는 대신 실재를 버려야 하는 타자로서의 A이다.

하지만 동일성향의 어떤 집단에서 상징적 존재로써의 나는 엄연히 내가 아님에도 진짜 나의 전부처럼 수용되곤 한다. 즉, 남과 다른 자신을 지정하는 '나'라는 대명사가 비록 상상의 실재, 상징적 실재, 관념적 실재, 인위적 실재를 규정하는 기호에 불과함에도 구성원들은 대개 실체화된 실재, 종극적(終理的)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겠으나 소통수단의 인위적 효용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실제로 다수는 세상 밖으로 드러나는 이미지를 자발적으로 걸러내길 주저한다. 그로부터 발생하는 지각과 의식이 진짜인냥 적시되는 적절한 포장지로 삼는다. 그리고 페이스북은 그 역할을 톡톡히 한다. 지금도 많은 이들은 그곳에서 연기를 하고 대본을 쓴다.

나 또한 그랬을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대표적인 소통수단인 '글'을 통해 여러 상징을 만들었을 터이다. 이미지로 덧대긴 해도 주된 표상은 글이고, 글은 대개 구체적,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은폐되는 대신 상징으로서의 존재가 형성되는 틀이었다. 타자에게 실재의 전부인 양 각인되는 주요 거푸집이었음도 부정하기 어렵다.

이는 달리 말해 글이라는 특정 방식이 가끔씩 현존의 나마저 변질시킨다는 부작용을 알면서도 상징과 기호로서의 나를 꾸미는데 거리낌없이 긍정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많은 이들은 '글'이 생성한 상징으로서의 나를 두고 섣불리 규정하고 지정했다. 세상에 등재시킨 기호 덕분에 단지 특정된 무엇을 확대, 재생산하며 쉽게 논하고 예단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와 같은 인식과 흐름은 억울하면서 합당한 측면이 있다. 그건 내가 아닌데 내가 되는 것이었지만, 어쩌면 나 스스로 그 가공의 나를 진정한 나로 각인시키려 애쓴 면도 없진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결국 억울함도 합당함도 모두 내탓이다.

다만 어떤 이유로든 실재의 나와 기호로서의 내가 완전히 분리되지 못한 채 거세당한 실재가 거름망 없이 수용되는 상황의 연속이 고통이라면, 나아가 그 고통을 완전히 증발시킬 수만 있다면 버리는 것이 훌륭한 메이크업이 가능한 무대를 유지하는 것보단 가치있다.

글과 말로는 극복할 수 없는 부분까지 재단되는 상황이 지속되고 의미를 거론하기 힘듦이 자각된다면, 더불어 의미를 의미롭게 설득하려는 노력이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라면 차라리 나에게 나로써의 참됨을 나부터 만들어가는 게 순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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