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낡은 청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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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낡은 청바지

최종수정 : 2018-01-31 08:00:00
김주식 언론인·세태평론가
▲ 김주식/언론인·세태평론가

내 젊은 날 패션은 늘 계절밖에 있었다. 단벌인 청바지가 그랬다. 피륙이 꽤 두터웠다. 겨울용이었다. 촌티가 났다. 사시사철로 입었다. 그렇게 된 건 한번 꽂히면 애착을 갖는 내 애오라지 성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유행을 타지 않는데다 값싸고, 자취생에겐 무엇보다 때가 덜 끼고, 끈질겨 여러모로 경제적이었다. 어지간했던 그 철갑옷도 그러나 내 집념의 천착과 세월을 버텨내지 못했다. 색이 바래고, 너덜거리더니 급기야 무릎 부위가 한 올 한 올 터져 피어올랐다.

옷 수선 아주머니는 혀끝을 끌끌 찼다. 돋보기를 끼고서는 단단히 누벼줬더랬다. 그것도 얼마 못 갔다. 올들이 나풀거렸다. 날줄은 닳아 없어지고, 수평의 씨줄은 기타 줄처럼 몇 가닥만 남았다. 무릎이 훤히 노출됐다, 내 낡은 청바지는 창피스러운 현실과 자존심으로 들끓는 낭만의 경계선에서 무척 방황해야 했다. 얼마 전 그 청바지를 봤다. 시내 한 옷가게 쇼윈도에 그 추억이 걸려 있었다. 그곳 청바지는 내 가슴 한켠에 자리 잡은 그 경계선을 당당하게 허물고 있었다.

무릎 부위를 노골적으로 뜯어 용수철처럼 감치듯 꿰매 맨살을 보이게 하는 청바지. 내 젊은 날에 딱 그 몰골을 한 청바지가 쇼윈도 명당을 차지할 줄을 누가 알았겠나. 낡은 옛 멋을 추구하며 나름 품위라는 부가가치를 얹은 빈티지 패션으로 거듭날 줄은 미처 몰랐다. 그 패션도 이미 고전이 된 지 오래건만, 여전히 가게의 간판격 명품이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저마다 모양과 색감이 독특한, 그래서 이 세상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작품이기에 그럴 것이다.

그 명품 청바지엔 또 다른 경계선이 아른거린다. 내 젊은 날에 느끼지 못했던 신기루다. 넘쳐나는 명품이 어서 구매하라는 유혹과 그 구매 욕구를 채울 수 없는 허기증이 겹친다. 거리를 지나던 청춘남녀가 그런 사이버 신인류의 쇼핑 스케치 한 장을 담아낸다. 쇼윈도에 걸린 청바지를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는다. 둘은 마치 명품을 구매한 양 만면의 미소를 띤다. 그 미소엔 어차피 가질 수 없는 것, 눈으로라도 한껏 입어보자는 심경이 배어 있다. 요즘 흔한 풍경이다.

눈으로 옷을 입는 세상! 명품을 구매해 포장을 풀고 소개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 콘텐츠가 등장하는 세태니 그럴 만도 하다. 그 영상은 럭셔리 구매 욕구를 힐링하는 입장에선 대리만족 채널이라는 게 심리학자들의 진단이라는데, 눈으로 즐기는 대리만족 콘텐츠가 어디 쇼핑몰에만 있을까. 텔레비전을 틀면 눈으로 먹고, 생활하고, 여행을 떠나는 채널이 많다. 그것이 힐링이 되든, 상대적 박탈감이 되든 우리네 삶의 새로운 바람이고 물결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눈으로 먹는 게 어떤 세상인지 안다. 몇 년 전 식이요법을 할 때 실감했더랬다. 텔레비전 화면을 가득 채운 김치찌개. 수년 묵은 신 김치라고 소개하는데 군침이 착 돌았다. 변화무쌍한 영상 기법은 일거수일투족 맛을 좇고 있었다. 두툼한 돼지고기와 두부, 맵싸한 대파가 송송 담겨 보글보글 끓는 장면. 그 맛의 격동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클로즈업하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놀라운 건 누군가 맛보는데, 나도 따라 먹고 있었다. 그날 눈요기로 맛있게 먹었다.

눈으로 예능인과 함께 생활하는 채널도 인기다. 그들의 스크린 바깥세상은 과연 어떨까? 사람들은 잠시나마 그들의 삶 눈높이에서 생활 동선을 밟으며 대리만족을 느낀다. 화려하게, 평범하게, 때론 평화롭게, 어쨌든 그들과 마음으로 공명하려는 것이다. 더러는 사람 산다는 게 다 그렇고 그렇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면서 힐링하는지도 모른다. 신인류의 대리만족은 현실과 신기루 사이에 끼어든 지나친 우리네 욕구의 부피가 얼마나 큰지? 생각해보라고 물음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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