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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잊힌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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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언론인·세태평론가

 


친구가 불쑥 내뱉은 한마디가 그날따라 가슴 시리게 들렸다. 세월 참 빠르다! 그 매정한 현실을 뿌리치려 했던, 그래서 가슴속에 욱여넣으며 유보해왔던 그 넋두리가 말이다. 그건 속절없이 저무는 한해가 공허함으로 밀물져와서일 것이다. 그날 서울 종로의 밤거리도 그랬다. 불을 환히 밝힌 거리는 한해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길모퉁이를 돌고 돌아도 이어지는 좁다란 맛집 골목들. 시간이 대낮부터 멎은 듯 밝았고, 사람들은 불빛을 기웃거리며 물결치고 있었다.

밤거리는 활기찼다. 모두가 올 한해를 저 불빛처럼 반짝거리며 살아왔을 터다. 탁자에 빙 둘러앉아 오순도순 머리를 맞댄 사진 한 컷이 정겨운 풍경화로 다가온다. 그러나 술잔이 부딪히는 소리에서, 손을 내밀어 크게 악수하는 마음에서. 연인들이 폭 껴안는 사랑에서 저무는 한해의 아쉬움을 본다.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멎어 있으리라. 술잔을 기울이며 세월 빠름을 달래도 가슴 한 켠에 여전히 뭔가 남아 있는 건 왜일까? 까닭모를 그 꿈틀거림은 도대체 뭘까?

그 이유를 알아내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친구의 건배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 실마리를 찾은 건 집으로 가는 길에서였다. 허연 김이 모락거리는 잔치국수를 파는 가게를 스치는데, 한 친구가 불현듯 떠올랐다. 초등학교 1학년 딱 이맘때였다. 친구는 장터에서 잔치국수를 먹고 있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연신 씻어 내면서. 그렇게 군침 돌게 맛있게 먹는 모습은 여태껏 못 봤다. 그날 이후 잔치국수를 보면 침부터 괸다. 면이라는 면을 죄다 좋아하게 된 까닭이다.

그랬다. 내 가슴을 노크하고 있었던 건 그런 옛 친구들이었다. 보고 싶은 얼굴들이다. 추억의 시간에 멈춰 있는 앳된 얼굴들. 녀석들의 얼굴이 흑백필름으로 흐른다. 색 바랜 그 장면들을 떠올리며 기억을 더듬는 것만으로도 마냥 즐겁다. 친구의 눈매들이 떠오른다. 다들 반갑다고 손짓하는 것 같다. 개중에는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는 친구들도 있다. 퍽 서운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잔치국수를 맛있게 먹던 친구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구나. 이젠 얼굴조차 가물거린다.

그 친구의 안부가 무척 궁금하다.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지낼까? 잊힌 이름만이라도 기억해내려 한참이나 맴을 돌았건만 아련하고 가마득하다. 마치 한 편의 영화가 끝난 뒤 자막으로 올라가는 숱한 이름 중 한 깜빡거림처럼. 이렇게 잊힌 이름들이 어디 한둘인가. 아, 이제야 가슴을 친다. 친구는 자신의 이름조차 몰라주는 내게 큰 가르침을 선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라는 삶에는 주연 배우만 있는 게 아니라 자막으로 사라지는 스태프들이 많다는 것을.

무대 뒤의 사람들! 작가며, 감독이며, 카메라, 음악, 미술, 조명, 의상을 담당하는 스태프들이다. 그들의 이름을 얼마나 기억할까. 그래서 그들의 숨은 노고를 감사하고 있을까. 관람객들은 그러나 영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일어나기 바쁘다. 더러는 감동의 여운이 남아 스크린을 응시하지만 자막엔 쉬 눈길을 주지 않는다. 아주 작은 글씨들이 왜 이리 빠르게 지나가는지. 화려함 뒤편에서 묵묵히 쏟은 열정과 시간을 생각하면 스치듯 지나가는 자막은 초라하기까지 하다.

가물거리는 영화의 자막은 저무는 한해의 끝자락과 닮아 있다. 자막이 흘러도, 한해가 다 가도록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스태프 같은 일상의 이름들! 그들은 우리네 삶을 꽃피우려 말없이 헌신했을 터다. 더러는 손발이 부르트도록, 몸이 깨져라 일했을 것이다. 그 피땀 같은 노고를 가족들이 알아주기에 남몰래 눈물을 찍어낸다. 그건 고단한 삶의 그림자를 이끌고 가는 원동력이고, 행복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대한민국의 작은 영웅,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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