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식사를 할 무렵, TV의 광고 한 장면이 친숙하게 다가온다. 내레이션이 그런다. '밥이 답이다'라고. 쌀소비촉진캠페인 카피인데, 그 말이 아련한 추억 속으로 이끈다. 그도 그럴 것이 수북이 담긴 고봉밥이 등장하니 옛 정취가 묻어난다. 까마득히 잊고 지내다가도 고봉밥이나 도시락 장면이 스치면 불쑥 눈가를 적시게 하는 추억! 그러고 보니 세상이 참 많이도 변했다. 쌀 소비를 위해 피부에 좋다고 어필하는 화면 속 밥과 내 유년시절의 밥 풍속도가 딴판이어서다.
유년시절, 밥은 이 세상 최고의 보약이었다. 추억은 초등학교 5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언제부터인가 점심때가 되면 교실 밖을 나가는 친구가 있었다. 도시락을 싸오지 않아서다. 왜 도시락을 싸오지 않느냐고 물으면 돌아오는 답은 늘 '배부르다'였다. 불룩한 배를 보여주기까지 했다. 아이들은 젓가락을 건네기도 했지만 그는 힘없이 손을 가로저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무슨 변고라도 있는 걸까? 먹을 게 없던 시절, 아이들은 그 본질적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 진실을 알려준 건 운동장 한 모퉁이에 설치된 수돗가였다. 아이들이 도시락을 먹는 동안 친구는 고개를 모로 젖힌 채 콸콸거리는 맹물을 마시고 있었다. 아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살기 위해 입을 오물거리며 밥처럼 먹고 있었던 거다. 마디숨을 몰아쉬면서. 아이들은 교실 창밖 너머로 그것을 목도하고 있었다. 친구는 며칠 후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아, 어쩌다 그 장면이 떠오르면 우울해지기에 가슴 바닥으로 밀어 넣지만 눈시울에 뜨거움이 배어나오곤 한다.
얼마나 배를 곯았던 걸까. 내가 철이 들었을 땐 수돗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곳이었다. 동네 공원 수돗가에서 손 씻는 아이들을 보면 그 친구가 오버랩 되곤 한다. 그 친구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그 때 그 시절을 되짚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밥은 먹었니? 가 인사였던 그 시절, 물힘으로 한나절을 버텨온 친구. 뛰놀다가 배고프면 수돗물로 힘을 충전하는 건 흔한 풍경이었다지만, 친구의 도시락 허기증은 눈물 나는 역사 그 자체였을 것이다.
쌀이 귀하던 시절, 밥 짓는 풍경은 색달랐다. 솥의 맨 아래층에 꽁보리를 앉히고 그 위에 쌀을 얹어 밥을 지었다. 가부장적인 집안에서는 어른 밥과 아이들 밥 색깔이 달랐다. 어른 밥은 고봉으로 꾹꾹 눌러 담은 새하얀 쌀밥이었다. 쌀밥은 부의 상징이었기에 집안의 대표주자인 가장만큼은 그랬는지 모른다. 아이들 밥은 거무스레했다. 쌀밥은 드넓은 꽁보리 밭에 잔설처럼 희끗거렸다. 아이들의 시선은 늘 어른 밥에 꽂혔다. 그렇게 윤기가 자르르 흐를 수가 없었다.
아이들의 입안은 더욱 자르르 윤기나게 침이 괴였다. 어른들은 알아차리고 있었다. 어른들은 늘 밥을 남겼다. 밥상을 물리면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아이들의 그 여분까지 고려했는지 쌀밥은 산더미처럼 높아가는 것만 같았다. 찬도 거의 남아 있었다. 조기며, 고등어며, 갈치며 노릇노릇한 생선구이는 아이들 몫이 됐다. 가시가 잘 발라진 채 고스란히 있곤 했다. 어른들은 헛기침을 밥상너머로 퍼내며, 아이들이 먹는 모습을 보곤 흐뭇해했다.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될 즈음 더러는 한동안 밥을 먹을 때 무심결에 몇 숟가락을 남기곤 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네 어른들의 밥 남김에서 알게 된 깊은 헤아림을, 애틋한 흔적을 그리워함일 것이다. 밥에는 장마와 태풍, 땡볕을 견뎌온 쌀 생성 과정의 인고(忍苦)가 살아 있다. 밥에는 물결치는 세파를 이겨낼 천연 보약이 들어 있는 것이다. 먹을 게 넘쳐나는 요즘이지만 밥은 여전히 몸의 보약이자, 삶에 보약이다. 저녁밥을 먹으며 새삼 밥의 소중함을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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