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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걷는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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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언론인·세태평론가

 


산의 표정이 생기발랄해졌다. 계절 변화에 수줍음을 타던 산들이 설렌 마음을 기어이 색깔로 표출했다. 나보란 듯이 산봉우리마다 울긋불긋 단풍으로 염색했다. 더러는 계곡을 타고 내려와 아래 마을의 길섶까지 단풍 물감을 뿌려놓았다. 서울 도심의 동네 산들도 점점 엷어지는 연초록색 바탕의 큰 화폭에 형형색색 단풍으로 수북수북 수놓을 태세다. 며칠 후면 물색 좋은 색동옷을 차려입고 나와 절정에 오른 자태를 한껏 뽐내며 우리를 깜짝깜짝 놀라게 할 것이다.

먼동이 틀 무렵, 왜 그렇게 그날은 가슴 설렜는지 모르겠다. 그건 아무도 호흡하지 않은 숲 공기를 마시며 거니는 호사를 누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장엄하게, 그러나 조용히 날개를 펴는 가을의 향연을 직접 보고, 맡고, 들을 수 있어서일 것이다. 그날 동네 산속은 단풍의 역사가 이제 막 이뤄지려 하고 있었다. 나무 둥치에 누운 낙엽들은 그 예고편이었다. 얼마나 가을앓이를 한 것일까. 갈색으로 바싹 마른 모습. 낙엽들은 마치 오랜 이야기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여명의 산속은 아늑했다. 바람도 쉬는 것 같았다. 꼬불꼬불 이어지는 흙길. 아득한 것이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파스텔 풍경이다. 나무숲 사이로 고운 색깔이 언뜻언뜻 보인다. 단풍 빛이다. 간밤에 몰래 물들였을 것이다. 숲속에 맑은 햇살이 퍼지자 푸른 잎 가운에 핀 꽃송이처럼 그렇게 화사할 수가 없다. 풀벌레도 감탄했는지 찌륵찌륵 목청을 돋우며 정적을 깬다. 저 멀리에서 가랑잎 구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산중의 쓸쓸함과 정겨움이 동시에 와락 밀려온다.

언제 이런 풍경을 또 볼 수 있을까 싶어, 숲길은 길었지만 아껴가며 걸었다. 따로 정해놓은 목적지가 없으니 걸음이 이렇게 방만할 수가 없다. 발길 닿는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걸었다. 걷다가 나도 모르게 낙엽 하나를 줍고 있었다. 마음도 어느덧 정처 없는 낙엽처럼 가을앓이를 한 탓일 게다. 메마른 걸 보니 여름날 그 지독한 장맛비에 잔가지와 함께 산화한 낙엽일 것이다. 마른 입살 안에 힘줄처럼 갈래갈래 뻗은 관다발의 잎맥이 어쩜 숲길을 빼닮았을까 싶다.

한 가운데 잎맥을 사이에 두고 양 옆으로 수 개의 관다발이 뻗은 숲길 모양. 낙엽은 이런 길의 원리를 어떻게 알았을까? 샛길을 빠졌더라도 종내 한 가운데 길에서 만나는 것을. 사람의 만남이라는 것도 이런 궤적을 그리려는 본능이 꿈틀거린다. 만남 하나하나가 그래서 소중하다. 허투루 할 일이 아니다. 만남의 길에서 사랑이 묻어오고, 사연이 묻어오고, 희로애락이 묻어오고, 추억이 묻어오는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순간들을 만들고, 가꾸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낙엽에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뒤안길만 있는 게 아니다. 희망이라는 언어가 숨 쉰다. 잎을 떨군 그 가지에 따스한 봄날 새싹을 틔울 것이라는 기약이랄까. 낙엽이 앙탈을 부리지 않고 내려오는 까닭일 것이다. 앙상한 가지들이 매서운 추위를 견뎌내는 것도 그런 언덕이 있음이다. 사람들이 사색하며 걷는 것도 따분한 굴레와 번뇌를 떨궈내고 새로운 동력을 찾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울긋불긋한 단풍 길을 걷는 것은 그 변화하는 색감을 느끼고자 함일 것이다.

길은 희한하게도 지루하거나 싫증나지 않는다. 코스모스길이든, 억새풀길이든, 가로수길이든, 숲길이든 계절따라 풍경이 다르거니와 걸을 때마다 매번 다른 생각의 지도를 그리게 하기 때문이다. 걸어온 길만큼 아기자기한 이야기꽃이 피어나는 것이다. 길은 한 번도 내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지만 걷는 의미를 깨우쳐주었다. 소슬한 바람결에 낙엽이 흩날리는 가을의 숲길. 햇살이 저만치에서 그림자 하나씩을 이끌고 걸어가는 사람들을 따사롭게 덮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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