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모래밭의 가을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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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모래밭의 가을편지

최종수정 : 2017-10-11 08:00:37
언론인·세태평론가 김주식
▲ 언론인·세태평론가 김주식

해는 크게 둥글어가고 있었다. 받아 안을 듯 해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았던 때가 또 있었던가. 가을이 깊어가는 해질녘의 고즈넉한 서해안 대천해변. 그 모래밭 한복판에 오도카니 앉아 바다 위에 떠 있는 해를 바라보다가 탄성을 질렀다. 벌거벗은 마음은 벌써 풍덩! 수평선 끝자락에 달려가 있었다. 물결치자 그 이글거리던 황금빛 노을이 해변 가장자리까지 밀려와서는 황홀하게, 아늑하게 가슴을 적신다. 낙조가 왜 위로가 되고 휴식이 되는지를 그제야 깨달았다.

호젓한 가을바다! 그 황혼의 무대에서 동화 속 주인공마냥 모래밭을 거닐다 또 하나의 감탄사를 만났다. 석양빛에 요철이 도드라져 보이는 황금 낙엽들. 잎사귀처럼 생긴 발자국, 알고 보니 갈매기들의 맨발 자국이다. 드넓은 모래밭이 온통 황금 낙엽을 수놓은 카펫 같다. 놀랍다. 언제 그 많은 발자국을 남긴 것인가. 저만치 갈매기 떼가 뒤뚱뒤뚱 낙엽을 연신 찍어내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모래밭과 그 주변의 바다 자연을 지키려는 원초적 몸짓인지도 모른다.

원시의 모래밭. 그곳을 스쳐갔을 발자국들을 떠올려본다. 밀려오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저 아득한 태고적 해변을 사박사박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를 더듬어본다. 조상들이 남긴 발자국 위로 숱하게 겹쳐졌을 후손들의 발자국들을. 오래된 발자국은 들숨날숨 날름거리는 파도에 의해 지워졌고, 사람들은 그 때마다 새 발자국을 새겼다. 바다는 그 상흔을 고운 모래로 살포시 감싸주기도 했지만, 때론 모래톱을 휩쓸고 갔다. 그랬다. 사람들에겐 바다는 세파의 흔적이었다.

사람들은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팍팍한 마음의 발자국을 지우려 바다로 달려가곤 했다. 청춘들은 그랬다. 하얀 모래 종이에 발자국을 꾹꾹 눌러 편지를 썼고, 파도가 읽고 지웠다. 그럴 때마다 갈매기들이 힐긋 쳐다보곤 했다. 청춘들은 사무치는 그리움을 바다를 통해 흘려보냈다. 더러는 수평선 너머 섬마을에 있을지도 모를 짝에 대한 막연한 설렘으로 바다를 향해 온몸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면 건너 섬마을 누군가의 애끓는 사연이 바다를 통해 밀물져왔다.

청춘남녀가 유독 해변 가장자리 물길을 따라 거니는 건 발자국을 찍고 지우면서 자신의 마음을 투영하고 싶어 함인지도 모른다. 섬마을 청춘들은 저 바다가 육지로 변신하는 신통력을 부려줄 것을 학수고대하던 시절이 있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더라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이란 노랫말이 공전의 히트를 친 시절이었다. 청춘의 바다는 마음의 바다였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 이후 꿈결 같은 오작교들이 속속 세워졌고, 청춘남녀의 사랑이 꽃폈다.

석양만 감상하겠노라고 바닷가에 앉았지만, 애초에 가슴 밑바닥에는 그런 생각이 없었는지 모른다. 그저 오랫동안 시간 모르게 앉아 있고 싶었다. 바다는 그러나 몸 색깔을 표출해 밤이 깊어 감을 알려주고 있었다. 검푸르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선이 어떤 곳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 하늘이 가깝게 느껴질 뿐이다. 물바람이 코를 스친다. 확 밀려오는 소금냄새를 맡으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달과 별 그리고 자우룩이 나는 갈매기가 추억 한 장을 담아낸다.

물바람에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이다. 기다란 호흡으로 넘실거리는 파도. 밤바다는 잠잠하고 고요했다. 허연 잔물결이 조신하게 다가와 모래를 적신다. 고단한 발자국들을 지운다. 찌든 감정의 찌꺼기들이 조각조각 부서진다. 모래알을 만지작거리는 물결소리가 웅숭깊고 보드랍다. 물결마다 호흡이 묻어 있는 것이다. 시월의 반환점을 향해 달려가는 가을바다는 그렇게 농익어가고 있었다. 가을이 주는 진정한 행복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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