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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실대 출신 독립운동가 3명 광복절 독립유공자 포상…누적 총 44명

숭실대 출신 독립운동가 3명 광복절 독립유공자 포상…누적 총 44명

숭실대 출신 독립유공자. 왼쪽 김양선, 오른쪽 김태술 /숭실대



숭실대학교(총장 황준성)는 개교 120주년을 맞아 숭실 출신 독립운동가 발굴 사업을 진행한 결과, 김양선(건국포장), 김태술(애족장), 김형두(대통령표창) 총 세 명이 올 광복절 독립유공자 포상에 확정됐다.

14일 숭실대에 따르면 이 대학 한국기독교박물관에서 숭실 출신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기 위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들을 조사하여 공적조서 및 평생이력서를 작성, 국가보훈처에 공적을 신청했다. 이에 정부는 김양선(건국포장), 김태술(애족장), 김형두(대통령표창) 세 명의 공적을 인정하여 독립유공자로 포상키로 지난 8일 확정했다. 이로써 숭실 출신 독립유공 포상자는 기존 포상자 41명에서 3명이 추가되어 총 44명에 달한다.

김양선(건국포장)은 1927년 숭실전문학교 문과 2학년에 재학 중 비밀결사 '청구회'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시작했다. 1929년 11월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확대되면서 평양에서도 학생들을 중심으로 반일시위가 시작됐다. 당시 숭실전문학교 3학년 수료 후 휴학 중이던 김양선은 격문을 작성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평양 각 학교에 전달하는 등 적극적으로 시위를 주도했다.

일본 경찰에 의해 최고 주모자로 지목되었던 그는 검거된 후 7월 24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출판법ㆍ보안법 위반으로 금고 3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여 1933년 졸업하였고 이듬해에는 다시 숭전에서 남은 학업을 마치고 제25회로 졸업했다. 1938년 초에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가 체포되어 1개월간 평양감옥에 수감되었으며, 1939년에는 8개월간 투옥됐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에 의해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어 예비검속이라는 명목으로 다시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이후 월남하여 남산 기슭에 한국 최초의 기독교박물관 및 매산고고관을 설립하여 관장을 역임하였으며 1954년 숭실대학 한국기독교박물관으로 이전, 개관했다.

한편 그는 역사학계에도 크게 공헌했다. 1946년 조직된 독립기념관건립기성회에서 상무위원직을 맡아 독립기념관 건립을 위해 힘을 쏟았다. 또한 국보·명승고적·천연기념물보존위원,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 경주국립공원위원, 한국사학회이사, 안중근의사선양회이사, 서울특별시문화재보호위원, 한국독립운동사료조사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고고학 분야에서 역삼동 주거지 발굴, 암사동 주거지 발굴 등을 지휘했다.

김태술(애족장)은 1919년 숭실대학 재학 중 평양 지역에서 전개된 3ㆍ1운동에 참여했다. 만세운동 이후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자 미국인 선교사 모의리(牟義理, E. M. Mowry)의 사택 지하에 은신하며 경고문(警告文)을 작성, 인쇄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5일 일본 경찰의 대대적인 가택 수색으로 만세운동 관련자들은 모두 체포됐다. 7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보안법(保安法) 및 출판법위반(出版法違反)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상고하였으나 10월 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숭실전도대원으로 순회 전도 강연을 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을 쏟기도 했다. 1920년 8월 28일 안주(安州)에서 "우리가 실력이 있으면 왜 남에게 수치를 당하리오"라는 강연을 하던 중 일본 경관에 의해 강연이 중지되고 경찰서로 연행되기도 했다.

김형두(대통령표창)는 숭실전문학교 문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30년 1월,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는 평양 지역 학생 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격문 살포 주모자 혐의를 받고 체포되어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국됐다. 같은 해 3월 13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출판법위반으로 금고 3월을 받고 상고하여 평양복심법원에서 금고 3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고 상고 기간이 만료되어 5월 6일 출옥했다. 1월 중순 경에 체포되어 약 3개월의 옥고를 치룬 셈이었다.

숭실대는 1897년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 박사가 평양에 설립한 '숭실학당'을 시작으로 1906년 '한국 최초의 4년제 대학'으로 인가를 받았다. 1938년 국내 대학으로는 유일하게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자진 폐교를 단행함으로써 민족적 자존심과 신앙적 절개를 지켰다. 1954년 서울에서 재건해 올해로 120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황민호 한국기독교박물관장은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하여 민족자존의 기치를 세운 선배들의 희생정신과 애국심을 기리는 계기로 삼고 앞으로도 숭실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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