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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문화종합

[창간 15주년 기획] 하현 작가의 12층 동행

작가 하현



[창간 15주년 기획] 12층 동행

우리 아파트는 내가 다섯 살 꼬맹이였던 시절 지어졌다. 20년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파트는 여기저기 낡아갔다.

금이 간 베란다 벽, 덜컹거리는 방충망, 여기저기 녹슬고 삐걱거리는 놀이터. 나는 그 정직한 낡음을 좋아한다. 딱 하나, 엘리베이터만 제외하고.

긴 세월 하루도 쉬지 않고 움직인 엘리베이터는 심심하면 한 번씩 말썽을 부린다.

모두 각자의 일과 속으로 떠나 아파트 전체가 고요해진 어느 평일 오후, 늦은 점심으로 먹을 햄버거를 포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현관을 통과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보이는 '점검 중' 표시가 어찌나 야속하던지. 아침도 거르고 빈속에 커피 한 잔밖에 마시지 못한 탓에 겨우 다섯 층을 오르고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눅눅해진 감자튀김을 떠올리며 손에 든 봉투를 만지작거리는데 저 앞에 누군가의 등이 보였다. 가끔 마주칠 때마다 내 긴 머리가 참 예쁘다고 칭찬해 주시는 16층 할머니였다.

얼른 뛰어가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고 다시 계단을 올랐다. 할머니는 친구분들과 추어탕 집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하셨다. 햄버거를 사러 나왔다는 내 말에 "아이고, 뜨신 국에 밥 먹지 왜 그런 걸 먹어. 한창 배고플 나이에." 하고 따라붙는 살가운 잔소리가 좋았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할머니는 자꾸만 느려지는 걸음이 미안하다며 몇 번이나 먼저 올라가라고 하셨다. 나는 "저도 힘들어서 빨리 못 걸으니까 같이 가요." 그렇게 대답하며 속도를 늦췄다.

할머니는 몇 번이나 숨을 고르면서도 평생 한 번도 긴 머리를 해 보지 못한 게 아직까지 아쉽다고, "그러니 아가씨는 누가 뭐래도 젊을 때 하고 싶은 거 다 하며 살라"고 말씀하셨다. 몇 번의 퇴사를 반복한 뒤 "어떻게 사람이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사니?"라는 말이 나를 공격하던 때였다.

천천히 계단을 오르며 나는 꼭 필요했지만 아무도 해 주지 않았던 위로를 받았다. 12층에 도착하자 할머니는 모셔다드린다는 내 말을 한사코 거절하며 얼른 들어가라고, 덕분에 적적하지 않게 올라왔다고 하셨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한 칸씩 멀어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어쩌면 그날 할머니와 나는 작은 산을 함께 올랐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웃이 아닌 동행(同行)이 되어. 함께 걸을 때, 우리는 더 멀리까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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