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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마을버스를 끈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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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언론인·세태평론가

 


잠결에 봄비 스치는 소리가 어째 좀 요란하다했다. 훤하게 무더기로 피었던 벚꽃이 길섶에 흥건히 누워 있다. 야속하다. 꽃 눈송이를 흠뻑 맞게 해줬더라면 이토록 서운하진 않았을 것이다. 봄비도 인간만큼이나 변덕스럽다. 메마른 꽃봉오리를 틔워 눈부시게 꽃 사태를 만들더니, 밤사이 시샘하듯 강풍까지 불러내 흩뿌려 놓았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봄비와 시간이 다르게 교차되는 기온의 오락가락에 아직 채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의 헷갈림은 또 어쩌란 말이냐.

지난 주말 동네 공원을 가로질러가는 길. 마을버스 차창 밖의 봄날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모처럼 친구와의 약속이 있어 가는 길이다. 시내 약속이 있을 땐 어지간해선 걷는 편이다. 한가한 날 늘어지는 몸에 탄력을 붙일 기회이기 때문이다. 물론 걸어서 30분내 거리다. 이 날은 약속이 늦었다는 핑계로 몸은 마을버스 뒤 좌석에 싣고 있었다. 성급하게 지는 봄꽃이 아쉬워서일까. 차창 밖을 내다보는 승객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무겁다. 화난 것 같다.

노쇠한 마을버스의 몸짓도 웬일인지 예사롭지 않다. 정차할 때마다 동작이 크다. 운전석 백미러엔 뿔난 운전사의 얼굴을 채우고 있다. 운전사의 심기를 누가 할퀸 것인가. 불현 듯 오래전 일이 떠오른다. 시장입구 정류장이었을 것이다. 그때도 마을버스의 액션이 컸었다. 닫히던 탑승 문이 뭔가에 놀란 듯 덜컹! 재차 열렸다. 얼마 후 툭! 묵직한 게 승차계단 상단에 얹힌다. 괴나리봇짐이다. 또 수초가 흘렸을까. 꾸부정한 할머니가 한 계단 한 계단 힘겹게 올라온다.

갈 길은 바빠도 어쩌겠나. 쉬엄쉬엄 굴러가는 게 마을버스인 것을. 할머니와 노쇠한 마을버스. 라이프 사이클이 '슬로우'라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문제는 할머니가 차에 올라 크게 한 숨을 돌리더니 자리에 앉으면서 생겼다. 차가 부동자세로 묶인 것이다. 할머니가 차비를 지불할 때까지 안전을 위해 정차해야 하는 상황. "할머니 차비내세요" 그런데 할머니는 묵묵부답이다. 성질이 났는지 차는 부르릉대며 공회전했고, 할머니는 차창 밖을 응시하며 딴청을 부린다.

운전사는 등을 돌려 할머니의 눈과 마주치지 않아야 했다. "또 그 할머니잖아! 이번엔 안 통해요" 운전사는 이런 날을 단단히 벼른 듯 차비를 받지 않으면 출발하지 않을 기세다. 할머니가 무임승차를 꽤 한 모양이다. 급기야 엔진 소리도 멎었다. 앞좌석에 앉은 한 아저씨가 대신 차비를 지불하겠다며 어서 가자고 재촉했다. 운전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할머니만 쳐다본다. 발이 묶인 그 마을버스를 움직이게 한 건 네다섯 살짜리 꼬마 여자 아이였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또랑또랑하고 맑은 천상의 목소리가 한바탕의 신경전을 일순 잠재운다. 엄마와 함께 차에 오른 아이의 결정적인 또 한마디가 가슴을 파고든다. "운전하시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세요! 아저씨" 운전사의 수고로움을 토닥여주는 따스한 한마디. "응 그래" 운전사의 목은 메어 있었고, 차는 출발했다. 아이의 인사 한 마디가 마을버스를 움직이게 한 것이다. 인사의 힘이란 이런 걸까. 그래서 인사란 돈이 들지 않는 동력이라고 했던 걸까.

곱씹어 생각할수록 콧잔등을 시큰하게 하는 추억. 세월이 흐르고 세태가, 방식이 바뀌었어도 인사는 늘 반갑다. 인사는 감동을 주는가하면, 용서하게 하고, 눈물을 흐르게도 한다. 이런 말은 그러나 그 아이에겐 때 묻은 논리에 불과할 것이다. 차에서 내려 한참 동안 마을버스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뒤뚱뒤뚱 평화롭다. 봄날은 그 때의 정겨운 추억을 싣고 그렇게 굴러가고 있었다. 무심한 봄비와 강풍이 밤새 벚꽃을 흩뿌려놓은들 어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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