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지하철에 몸을 실으면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가 있다. 마주하는 군상들의 표정에서 밀도 높은 일상을 담금질해온 삶의 고단한 흔적이 보인다. 더러는 주름진 얼굴에서 굴곡진 한 편의 대하드라마 같은 인생 스토리가 흐른다는 걸 느낀다. 지하철과 사람은 꽤 닮아 있다. 종착역을 향해 내닫는 지하철은 꿈과 희망을 안고 클라이맥스를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가는 군상의 모습이다. 찌든 삶을, 강퍅한 세파를, 무거운 짐을, 아귀다툼을 연소하는 모습이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엊그제, 지하철 안은 화사했다. 병아리색 원복을 차려 입은 유치원생 열댓 명이 군데군데 샛노란 꽃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사생대회라도 다녀왔는지 서너 명씩 옹기종기 모여 스케치북을 펼쳐들고 그림 품평회가 한창이다. 시끌벅적했지만, 승객들은 모처럼 '병아리 떼 쫑쫑' 재롱에, 향수에 젖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어린 여선생님이 이따금씩 집게손가락 하나를 치켜들어 쉬! 입술에 얹힐 때마다 떠들썩은 재잘재잘로 가라앉는다.
그런데 내 옆 한 녀석은 아까부터 어째 조용하다. 어디 아픈가. 힐끔 녀석을 보니 잔뜩 주눅이 든 얼굴이다. 눈꼬리가 축 처진 채다. 손에는 스케치북에서 뜯어낸 그림 한 장이 들려 있다. 꼬깃꼬깃 구겨진 그림. 그건 또 왜 구겨졌을까. 그림에 무슨 사연이 있나 싶어 막 감상할 참이었다. 그 때 건너편 한 녀석이 달려와 그림을 덥석 낚아챈 뒤 아이들에게 들어 보인다.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친다. "선생님, 그림이 이상해요!"
눈 처진 아이는 그림을 되찾으려 달려들었고, 한바탕 소동이 인다. "공공장소에서 떠드는 것 아니랬지!" 선생님의 경고가 아이들을 돌려세운다. 그림은 눈 처진 아이의 손에 다시 꼭 쥐어졌다. 전후사정을 보니 아이들이 그 그림을 놀림감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떤 그림을 그렸기에? 그림을 보니 덩그러니 나무 한 그루다. 소나무를 그린 것 같은데, 문제는 색깔이었다. 엉뚱했다. 잎 색깔이 온통 노란색이다. 초록색이래야 점박이처럼 드문드문이다.
상식의 틀을 깬 색칠. 그게 눈 처진 아이를 놀림감으로, 외톨이로 만든 것이다. 왜 그렇게 그렸을까. 잎마다 봄 햇살이 부서진 황금색을 입히려 했던 걸까. 혹여 사람들은 그 아이의 그런 시선을, 감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뭉개고 있었던 건 아닐까. 녀석은 내 눈치를 살핀다. 눈빛은 애절했다. 방금 내가 생각한 걸 말해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잎이 금가루를 뿌린 듯 햇살 가득 하네", "상상력이 풍부하구나!" 순간 녀석의 뺨에 눈물이 또르르 굴렸다.
칭찬의 힘이란 이런 것인가. 놀려댈 줄 알았던 모양인데 뜻밖의 칭찬에 감동했던 것이다. 저만치 선생님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고, 환한 미소가 번졌다. 좌절과 절망의 늪에 빠진 녀석을 건져냈다는 생각이 문득 스치자 전율이 인다. 칭찬 한 모금에 저토록 목말라했던 걸까. 칭찬의 갈증! 녀석의 눈물은 그걸 말하고 있었다. 세상 물정을 아는 어른들도 칭찬 한 마디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는 것을. 흰 도화지인 새싹들은 오죽할까.
그 새싹의 뿌리에 따스한 칭찬이 스며들면 자신감이 자라나고, 긍정적이고 창의적인 꽃이 활짝 필 것이다. 칭찬 여부에 따라 인간관계와 인생행로의 열매가 달라지는 것이다. 혹자는 그래서 칭찬은 인생 성장의 원동력이라고 했더랬다. 미국의 유명 경영 컨설턴트인 켄 블랜차드의 저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가 거저 나온 게 아니다. 가슴에서 우러나는 칭찬 한 마디가 아이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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