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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원시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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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언론인·세태평론가

봄비는 기어이 일을 저질렀다. 계절을 알아차리고 슬그머니 찾아와 땅부터 적셔 놓았다. 새침데기다. 조용히 흩뿌리고선, 은근히 그러나 오달지게 적시는 봄비! 화들짝 놀란 땅은 꼭 무슨 일을 벌일 것만 같다. 연방 새싹들을 밀어 올릴 기세다. 꼬장꼬장 메마른 나무들도 생기가 돌았다. 뭉게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고개를 내미는 햇살이 따스하다. 수런대던 새들은 우르르 몰려나와 살랑대는 바람을 타고 동네 산허리를 가로지르며 한 폭의 수채화를 완성한다.

우수(雨水)를 흘러 보낸 요 며칠사이 비는 그렇게 우리 모두를 적시고 있었던 거다. 사실 봄 낌새는 몸이 먼저 알아차린다. 마음부터 설렌다. 그런데 봄은 참 묘하다. 그 심쿵거리는 마음 밑바닥에 허허로움이 겹치니 말이다. 어릴 적부터 무한대로 느꼈을, 그러나 종잡을 수 없는 신기루랄까. 그 까닭모를 감성의 맥박을 진작에 더듬고 있었다면 이토록 공허하진 않았을 것이다. 몸앓이에 가슴앓이까지, 혹자는 그런 걸 두고 봄앓이라고 했더랬다.

봄비 적신 동네 공원을 걷는 날 왜 뜬금없이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누렇게 바랜 잔디밭에서 묻어나는 흙냄새 때문이었을 게다. 한 줄기의 추억이 빗소리에 실려 온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마로니에 공원이 온통 흙바닥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빗줄기가 후드득 꽂힐 때 풀풀거리던 흙냄새가 좋았다. 아는 연극배우와 자주 만나던 곳이다. 무대가 끝나는 날 흙바닥에 퍼질러 앉아 비 적시며 소주잔을 기울이곤 했다. 퍽 낭만적이었다.

나는 마로니에 흙길을 거닐면서 비의 정서를 배웠다. 비 오는 날 흙바닥에 떨어진 꽃잎이 보석처럼 빛난다는 걸 알았으며, 비 젖은 텅 빈 벤치에는 기다림의 미학이 있다는 것도 배웠다. 울적한 마음을 씻어내는 것도 비다. 지금도 비를 온전히 맞는 걸 좋아한다. 어쩌다 호젓한 흙길을 만나면 반갑다. 낙엽이 흙이 된 오솔길이면 더 좋다. 그곳에서 예기치 않은 단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코를 킁킁거리며 흙냄새를 맡곤 한다.

마로니에 공원이 기억 저편에서 아른거리게 된 건 그 누런 흙바닥이 아스팔트로, 콘크리트로 코팅됐기 때문일 것이다. 원시의 흙냄새! 그 추억의 흙을 만나려 요즘 동네 산에 자주 오른다. 나뭇가지들은 앙상하지만 산은 왠지 포근하다. 흙이 산을 감싸고 있음이다. 산그늘이 앉으면 아늑하다. 비와 어울리는 산이다. 비가 추적거리면 헤아릴 수도 없는 다양한 빛깔의 흙냄새가 풋과일처럼 물씬거린다. 빗소리도 다양한 빛깔의 건반을 탄다.

동네 산 아래 공원은 왁자지껄하다. 뛰노는 아이들이 정겹다. 아이들의 질주 본능이 나온다. 그러나 바닥은 아스팔트다. 저러다 넘어지면 어쩌나. 아니나 다를까 아이의 이름 부르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뛰면 다친다는 경고의 메시지다. '하지 마라'는 소리에 유난히 길들여진 아이들은 이내 뛰는 걸 멈춘다. 아이들은 날개를 한껏 펼쳐 달리고, 뛰고, 뒹굴고 싶었을 것이다.

흙은 푹신한 솜이불 같은 존재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도심의 아이들은 흙을 모른다. 그 웅숭깊은 포근함을, 촉감을, 숨결을, 내음을 모른다. 흙이 '흙수저'로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세월 빠르게 달라지는 세태를 어찌 탓할 수 있으랴마는 흙은 이렇게 중얼거릴 것이다. 희망의 씨를 싹 틔우고, 까닭모를 허허로움을 위로해줄 마음의 쉼터가 바로 흙이라고. 단비가 풋풋한 흙냄새를 퍼올리며 봄을 재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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