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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완행열차의 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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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언론인·세태평론가

어쩌다 덜커덩거리며 완행하는 기차를 보면 만남과 이별이 교차한다. 그리운 임 만나려 버선발로 달려가는 기차는 출발부터 설레지만, 변심한 임을 실은 기차는 붙잡아도 뿌리치며 냉정하게 발차한다. 행선지는 같아도 사연에 따라 기차는 색감 다르게 사무치는 것이다. 오랜 세월을 달려온 기차의 녹슨 창틀의 모습엔 그런 애환이 비친다. 명절날의 기차 이미지는 만남과 설렘. 매서운 추위가 종종걸음을 재촉하던 이번 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른 아침 서울역 플랫폼 앞에 들어선 KTX 고속 열차는 허연 입김을 푹푹 뿜어내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몸을 싣자 KTX는 미끄러지듯 역을 빠져나가더니 금세 속도에 탄력이 붙였다. 시속 300㎞의 속력! KTX가 그 질주본능을 드러내지 않았더라면 전날부터 한껏 부풀었던 설렘이 무뎌지지 않았을 거다. 번득이는 스피드는 시간과 공간만 좁힌 게 아니었다. 강퍅한 세파를 누그러뜨리며 어렵사리 싹 틔우는 감성의 여유조차 좁혔다.

아련하게 스케치하던 향수의 낱장들을 동심의 물감으로 채 물들이기도 전에 어서 내려라 한다. 플랫폼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눈 깜짝할 새 증발하는 기차를 바라보는 연인의 심경은 또 어떨까. 맨바닥에 퍼질러 앉아 목 놓아 울기엔 기차는 너무 쏜살같다. 찔끔 눈물 한 방울도 허용하지 않는 냉정한 속도다. 헉! 이 짧은 외마디의 카타르시스로 이별 정거장이 종영되는 이런 어색함도 없다.

스피드의 속성은 야멸차다. 뿌리치는 기차를 원망할, 감정을 추스를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세상은 그러나 빠르고 편리하게 진화하는 것이기에 스피드를 탓할 순 없다. 빠른 속도에 매료돼 우리네 심장박동은 뛰었고, 그렇게 불붙은 속도 경쟁은 정보 통신(IT) 강국으로 일궈냈기에 그렇다. 스피드는 부와 성공을 안겨주었고, 그 두 단어의 대명사가 됐다. 사람들은 성공했을 때 '앞만 보고 달렸다'는 표현을 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가히 스피드가 미덕인 세상이다.

객차 창밖 시골 풍경의 필름은 달리는 속도에 압도돼 숨 가쁘게 돌아갔다. 컷마다 스토리를 담아낼 완행 정물화는 실종됐다. 사람들이 열차가 출발하자마자 커튼을 치고 잠을 청하는 까닭이다. 더러는 무슨 영문인지 스마트폰과 열심히 싸운다. 널따란 창에서 손바닥 크기의 IT 화면으로 대체된 생각의 공간. 옆 사람과 말을 나눌 여유는커녕 눈길조차 던지지 않는 시대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수런수런 이야기꽃이 피어나던 저 완행의 추억이 그래서 그립다.

KTX가 경부선의 중간 역인 대전역에 정차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그 기회가 찾아왔다. 객실 창 너머의 무궁화호 열차! 그 무궁화호가 시곗바늘을 30년 전으로 되돌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완행열차 통일호를 마주하게 해준 것이다. '쉬어간들 어떠리'라고 벽계수의 말고삐를 잡는 황진이 같았던 통일호는 속도에 갇혀 지워진 낭만을 떠올려주었다. 객차의 덜컹거림이며, 군침 돌게 하던 삶은 계란이며, 왁자지껄 밤새 이야기꽃을 피우던 모습을….

대전역엔 잊을 수 없는 추억 한 장이 담겨 있다. 1980년대 당시 플랫폼 부근에 간이 우동집이 있었다. 우동 먹는 재미가 여간 아니었다. 정차시간은 3분. 내리고 타고, 우동값 계산하고, 기다리는 시간을 빼면 채 2분도 안될 거다. 주문은 쇄도했고, 초를 다투며 몇 가닥을 입속에 넣으려다 기차를 놓칠 뻔했다. 기차는 움직였고, 스톱! 외치고 또 외쳤다. 기차는 멈춰 서줬다. 그 인정 넘치던 낭만 완행열차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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