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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하철 40년 비하인드 스토리] (4) 35년전 '현저동 붕괴사고'를 기억하시나요

[서울지하철 40년 비하인드 스토리] (4) 35년전 '현저동 붕괴사고'를 기억하시나요

1982년 4월 현저동 붕괴사고 현장사진 /서울메트로



지하철은 언제나 안전이 최우선이다. 지하철 운행에서는 물론이고 지하철공사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느 사회에서나 이 당연한 원칙을 확립하는 데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1982년 4월 3호선 공사 중에 발생한 '현저동 붕괴사고'는 사망자 10명, 부상자 45명이라는 희생자를 낳는다. 지하철 공사 사상 최악으로 기록된 사고다. 이 희생을 치른 뒤에야 우리나라는 지하철공사에서 '선 안전 후 시공'이라는 개념을 확고히 정립할 수 있었다.

과거 지하철 3·4호선을 건설하는 동안 추락, 상하수도 누수, 지반침하 등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모두 166건에 달할 정도였다. 지하철 불모지 한국이 겪어야 했던 시행착오였다. 하지만 82년 4월 서대문구 현저동에서 일어난 사고는 시행착오라고 하기에는 대가가 너무 컸다. 태어난지 겨우 반 년에 불과했던 서울지하철공사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사고였다.

현저동 붕괴사고는 독립문역 인입선 공사구간인 3호선 318공구에서 일어난 사고로, 작업장 내에서 사용하던 다이너마이트의 충격으로 상수도관이 파열되면서 시작됐다. 파열된 상수도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압으로 인해 토류판(흙을 막는 가시설물)이 무너지자 굴착한 구간 위 도로면에 깔아놓은 가설재, 즉 복공판이 600여장이나 무너져 내렸다.

이 사고로 작업 중이던 인부 10명이 사망하고, 복공판 위로 지나던 버스의 승객 45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상수도가 파열되고 지중 고압케이블과 통신케이블이 절단되었으며 의주로~무악재 구간의 교통이 완전 두절됐다. 이로 인해 버스노선을 세검정, 금화터널 등으로 우회시켜야 했다.

이 사고를 수습하고 복구를 완료, 다시 공사를 재개하는 데만 한 달이 걸렸다. 공사는 재개했지만 시공방법이 그대로라면 같은 사고가 반복될 우려가 있었다. 결국 시공방법을 바꿔야 했다. 공사는 사고지점의 인접구간에 가설 강재를 보강하는 한편, 시공방법을 면밀하게 재검토했다. 그 결과 터파기방식을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을 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파이프 매설 방식의 터널공법인 파이프-메서 공법을 채용했다. 뿐만 아니라 시공이 불가능한 부분을 피하기 위해 지하철 노선 위치를 일부 변경하기도 했다.

현저동 사고를 계기로 공사는 시공현장의 안전관리를 한층 강화했다. 안전시공지도를 위한 안전시공심의위원회 설치, 설계단계서부터 위원회의 안전시공조사를 거친 후에야 시공에 임하도록 제도화했다. '선 안전 후 시공'의 개념이 자리잡게 된 계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사에 닥친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84년 여름에는 무려 700mm의 폭우가 쏟아졌다. 이로 인해 2호선 영등포구청역과 사당역이 침수돼 전동차 운행 중단사고가 발생했다. 공사는 모든 역에 모래주머니와 비닐포장지를 준비하고, 출입구와 환기구를 높이도록 했다. 수해 예방 훈련도 수시로 실시했다.

이렇게 수해마저 극복하자 '지상의 고속터미널은 침수되어도 그 지하에 있는 지하철 3호선은 무사히 운행한다'는 명제가 탄생하게 됐다고 공사의 후신인 서울메트로는 회사 역사에 기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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