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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김주식의 세태 만화경] 떼탕의 행복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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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식/언론인·세태평론가

그곳은 희부연 입김으로 자욱했다. 손바닥만 했으니 물안개 속이었다. 솜구름이 켜켜이 흐르는 몽환적인 풍속도랄까. 화폭에 담았더라면 희미하게 어슬렁거리는 안쪽 세계가 궁금해 솜구름을 지웠을 것이다. 그곳에 모처럼 대목을 맞았다. 아슬아슬 찰랑대던 욕탕 물은 동네 아저씨가 엉덩이를 들이밀자 경계수위를 기어코 넘고야 말았다. 사람들도 그렇게 넘쳐났다. 평소 찔끔거리기만 하던 굴뚝도 덩달아 신이나 불을 뿜어댔다. 70년대 초 목욕탕 풍경이다.

설날 전날이었을 것이다. 진풍경이 목도된 건 비좁은 탈의실에 막 들어섰을 때였다. 엉거주춤 어줍은 몸짓들! 하나같이 수건으로 앞면을 모자이크 처리하고 있었다. 웬 가림? 그런데 어쩌랴. 예외가 없는 것을. 나도 그 암묵적 체면치례에 따라 가리고 또 가렸다. 사람들은 왜 그래야만 했을까? 대중목욕탕에 익숙지 않은 그 시절 겸연쩍은 탓일 게다. 사람들은 목욕탕을 '떼탕'이라 불렀다. 추석이나 설날 전날만 되면 떼로 몰려온다고 해서 붙여졌다.

그 시절 떼탕 주인을 부를 땐 박수를 쳤다. 환영의 박수갈채가 아니다. 짧고도 강한 단 한 번의 박수. 줄어든 욕탕 물을 채워달라는 신호였다. 명절 전날에는 박수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 때마다 주인은 황급히 달려와 잠금을 풀고 뜨끈뜨끈한 물을 채워주었다. 샤워 부스가 따로 없었으니 바가지가 샤워기였다. 바가지로 공용 욕탕 물을 떠서 세수하고 몸도 헹궜다. 그러니 온전한 새 물을 만나려면 이른 새벽부터 눈을 비비며 집을 나서야 했다. 그래도 신났다.

동네 떼탕의 건물 배치도는 묘했다. 한 울타리 안에 남탕과 여탕이 들어앉은 구조. 한 복판에 담장을 세워 탕을 구분했다. 그런데 담장 위 부분은 뻥 뚫려 있다. 소통하기 딱 좋은 창구다. 목욕이 끝날 즈음이면 어서 나와라는 아우성이 이편저편에서 터진다. 욕탕은 늘 이야기꽃이 피었다. 별의별 얘기가 담장 너머로 물안개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 어쩌다 애정 스토리가 절정에 달할 양이면 설전이 담장을 넘나들었다.

국민소득 300달러도 채 안 되던 그 시절. 열악한 시설에 물줄기도 시원찮았던 떼탕엔 사람 사는 냄새가 묻어났다. 가슴 설렌 사람들이 모였다. 먹고 살기 힘들었어도 목욕 한 번이면 날아갈 듯이 기분 좋았다. 그 삶의 질을 수치화할 순 없을까? 떼탕의 행복지수! 무척 궁금했는데 엊그제 그걸 수치화하겠다는 소식이다. 투자와 소비 위주의 경제적 지표에 사회적, 심리적, 환경적, 가족적 요소들을 반영하겠다니 만시지탄이지만 다행이다.

3만 달러를 바라보는 오늘의 떼탕 풍경은? 재개발에 밀려난 떼탕은 최신식 불가마 찜질방과 사우나로 대체됐고 그나마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떼탕은 그 때 그 시절의 때탕이 아니다. 20~30대 젊은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할아버지들이 대부분이다. 벽과 마주한 채 혼자 목욕하는 이른바 '혼탕'의 새 풍속도다. 등 밀어주고 머리 감겨주는 그런 풍경은 지워진 지 오래다. 탕의 모락거림도 시들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더 나은 삶 지수'에서 한국은 조사대상 38개국 중 하위권인 28위. 2013년 25위 보다 3계단이나 밀려났다. 물질은 풍요하지만 삶의 질은 오히려 뒷걸음질 친 오늘날이다. 떼탕은 추억의 뒷장으로 넘길 태고의 성역으로 남아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투박하지만 떼탕의 삶을 복원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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