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人 머니 산업 IT·과학 정치&정책 생활경제 사회 에듀&JOB 기획연재 오피니언 라이프 AI영상 플러스
글로벌 메트로신문
로그인
회원가입

    머니

  • 증권
  • 은행
  • 보험
  • 카드
  • 부동산
  • 경제일반

    산업

  • 재계
  • 자동차
  • 전기전자
  • 물류항공
  • 산업일반

    IT·과학

  • 인터넷
  • 게임
  • 방송통신
  • IT·과학일반

    사회

  • 지방행정
  • 국제
  • 사회일반

    플러스

  • 한줄뉴스
  • 포토
  • 영상
  • 운세/사주
스포츠>스포츠종합

[영원한 국가대표] 태권도 정국현 "힘들어도 태권도에 대한 마음은 잃지 않았죠"

1988년 서울 올림픽 남자 태권도 웰터급 금메달리스트 정국현 한국체대 교수./손진영 기자 son@



올림픽이 열릴 때마다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는 종목이 있다. 태권도도 그중 하나다. 1988년 시범종목으로 처음 올림픽 무대에 오른 태권도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부터 정식 종목으로 채택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태권도의 종주국인 한국에게는 대표적인 '메달밭'이다.

태권도가 전 세계인이 즐기는 스포츠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국제 무대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국내 선수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수가 바로 1988년 서울 올림픽 남자 태권도 웰터급 금메달리스트인 정국현이다. 1981년부터 국가대표로 활약해온 그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4회 연속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으로 태권도를 전 세계에 알렸다.

전라남도 출생인 정국현은 어릴 적부터 뛰어난 운동 실력으로 스포츠에 대한 꿈을 키워왔다. 그러나 처음부터 태권도를 한 것은 아니었다. 전남체육중학교(현재의 광주체육중학교) 입학 당시만 해도 배구가 주 종목이었다. 하지만 작은 키 때문에 배구부에서 뛰지 못하게 된 그는 잠시 레슬링부를 거쳤다 태권도로 전공을 바꾸게 됐다. 그때 당시 중학교 2학년, 남들에 비하면 조금 늦은 때였다.

"운명이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사실 축구와 배구도 좀 하고 체조도 했거든요. 그리고 경쟁하는 걸 좋아했어요. 태권도 같은 투기 종목은 승부 근성이 필요하거든요. 그런 점에서 태권도는 기질적으로 잘 맞았죠. 순발력도 좋았어요. 키는 작았지만 누구보다 빨리 때릴 수 있었으니까요."

1988년 서울 올림픽 남자 태권도 웰터급 금메달리스트 정국현 한국체대 교수./손진영 기자 son@



처음부터 성적이 잘 나온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2학년까지는 좀처럼 성적을 내지 못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실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실력을 바탕으로 1980년에 한국체대에 진학했다. 그러나 낯선 서울 생활과 때마침 불었던 민주화 투쟁의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운동을 제대로 못한 채 고민의 시간을 보냈다.

"서울이 낯설다 보니 적응이 안 됐어요.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보면서 기도 죽었고요. 그러다 1학년 말에 학교에서 성적이 없는 사람은 퇴관 조치를 내리겠다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게 계기가 돼 정말 열심히 훈련을 했어요. 그래서 1981년 처음으로 국가대표가 돼 세계선수권대회에 나가게 됐죠."

이듬해 1982년 에콰도르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처음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땀과 노력의 결실이었지만 마음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이상하게 허탈감이 들었어요. '이걸 잠깐 목에 걸기 위해 이 고생을 했나?'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슬럼프가 왔죠." 그러나 정국현은 포기하지 않았다. "스포츠 선수들은 다 그런 것 같아요. 메달을 딴 뒤 허탈함을 느껴도 또 다시 정상에 서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다시 출발하게 되는 거죠." 이후에도 정국현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연이어 금메달을 목에 걸며 4연패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현재까지도 태권도 세계선수권대회 4연패를 기록한 한국 선수는 정국현이 유일하다.

1987년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로 정점을 찍은 정국현은 곧바로 은퇴를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태권도가 시범 종목으로 발탁되면서 대한태권도협회로부터 한 번 더 국가대표로 뛰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태권도에서 세계적인 실력을 자랑하는 정국현이 올림픽 첫 대회에서 뛰는 것만큼 의미 있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열심히 했어요. 인류의 제전인 올림픽,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대회에서 지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죠. 저보다 키가 20㎝나 큰 선수들을 상대로 멋진 경기를 보여줬습니다. 다만 결승전에서는 상대 선수가 기권을 하는 바람에 아쉽기도 했어요. 하이라이트인 만큼 멋있게 뛰고 싶었는데 분위기가 조금 식어버렸죠(웃음)."

1988년 서울 올림픽 남자 태권도 웰터급 금메달리스트 정국현 한국체대 교수./손진영 기자 son@



그렇게 한국 태권도의 역사에 한 획을 새긴 정국현은 지금 한국체대 태권도학과 교수로 지도자 양성에 온힘을 쏟고 있다. 2013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세계태권도연맹 집행위원으로 선출돼 국제 경기로서 태권도를 더욱 발전시켜나가기 위한 노력도 함께 기울이고 있다. 국가대표 출신 선수들의 복지를 위해 설립된 대한민국국가대표선수회 부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물론 지금과 같은 위치에 오르기까지는 은퇴 이후 겪은 고된 여정이 있었다. 1989년 현역에서 은퇴 이후 끊임없이 가져온 고민이 지금의 그를 있게 만들었다.

"영어를 하면 태권도를 통해 할 수 있는 다른 기회가 더 많이 생길 것이라는 꿈이 있었어요. 그래서 미국에서 유학도 했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선수들을 가르치며 시간을 보냈죠. 1997년 IMF 사태가 터지면서 실업자가 되기도 했고요. 우여곡절 끝에 2000년부터 한국체대 교수가 돼 지금까지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보면 그래도 비굴하지 않게 나의 정체성을 갖고 묵묵히 해온 것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정국현이 지금 스포츠계에 바라는 것은 보다 글로벌한 인재가 많이 나오는 것이다. "다른 종목도 국제기구에서 활동하는 선수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봐요. 외국은 다 그렇게 하는 시스템이거든요." 지난해 6월부터는 세계태권도연맹 기술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올해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이 끝난 뒤 태권도 국제 경기 규칙도 바꿀 생각이다. 지금보다 더 재미있는 태권도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한국이 태권도의 종주국이라고 하지만 변화는 이미 시작됐습니다. 이제는 한국이 태권도를 독식할 수도 없고 독식해서도 안 돼요. 그래서 더욱 국제적인 마인드로 외국인과 함께 소통해야 하죠. 그것이 제가 해야 할 일이죠. 리우 올림픽을 앞둔 후배들에게는 '최선을 다하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스포츠는 결과가 말해주는 냉정한 사회지만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그것만큼 좋은 것은 없으니까요. 매너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고요. 무엇보다 자기 컨디션 관리가 중요합니다. 최선의 컨디션으로 좋은 결과를 내길 바랍니다."

◆ 정국현 프로필

1962년 전라남도 출생·전주체육중학교-전주체육고등학교(현 광주체육중학교-광주체육고등학교) 졸업·한국체육대학 체육학과

1981년 국가대표 발탁

1982~1987년 세계선수권대회 4연패

1988년 서울 올림픽 남자 태권도 웰터급 금메달

1989년 현역 은퇴

2000년~ 한국체육대학 태권도학과 교수

2013년∼ 세계태권도연맹 집행위원

2015년∼ 세계태권도연맹 기술위원장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Copyright ⓒ 메트로신문 & metr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