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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시시일각] 나는 '을'이다

홍경한 미술평론가·칼럼니스트



대학은 그림 그리는 방법은 알려줄지 몰라도 미술계 구조와 제도에 대한 교육에는 친절하지 않다. 그들은 혹시 모를 이탈을 막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선택지를 제대로 공개하지 않는다. 때문에 졸업과 동시에 대부분의 젊은 작가들은 태산처럼 높은 실재의 벽과 맞닥뜨린다.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그동안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울타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협소했는지 체감하며 놀라움과 좌절을 동시에 맛본다.

그럼에도 밖으로 나온 작가들의 다수는 언젠가 듣거나 읽은 '작가의 삶은 버티기가 9할'이라는 발언을 되새김질하며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가지려 애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불안을 희석시키려는 자발적 최면에 불과함을 머잖아 자각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 어느 곳에서든 '예술가' 혹은 '작가'라는 명사가 그리 융숭한 대접을 받는 것도 아닐 뿐더러, 미술계 내에서조차 정확히 '갑'과 '을'로 구분된 채 구동되고 있음을 필연적으로 목도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술계 젊은 작가들은 여러 표정으로 부지불식 다가오는 갑을의 문제와 수시로 조우한다.

작가 A는 얼마 전 소위 지역 문화예술계 권력자라 불리는 이들로부터 겪어야 했던 불편한 상황을 상기할수록 기분이 좋지 않다. 그는 기회의 간절함을 빌미로 가해진 특정적, 비인격적인 대우와 마주했고 이에 대해 "모멸스러웠다"고 말한다. 그는 미술계도 사회의 일부이니 원래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감당하기엔 초라해지는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작가 B는 최근 개인전을 치르는 과정에서의 경험에 진절머리를 냈다. 선정 작가로 뽑혔다는 기쁨도 잠시, 애초 약속에 없던 이유로 금전을 요구해 거절했더니 돌아온 건 미술계 활동 운운하는 협박 아닌 협박이었다며 울분을 토했다. B는 그 화랑 주인이 학교 선배라는 사실에 더욱 절망감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이밖에도 타인을 필요수단으로 보는 미술계 갑을의 사례는 적지 않다. 짙은 독선과 자기애로 무장한 채 하늘 위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함을 설파하려는 이들, 하숫물 같은 인간관으로 타인을 멸시하고 하대하는 자들까지 수두룩하다. 심지어 이런 현상은 작가와 작가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일례로 전시기획이라는 볼품없는 권력을 이용해 기회에 목말라하는 작가를 성적으로 유린했다는 주장이 담긴 근래 한 누리집 게시물이 대표적이다.

사실 이쯤 되면 '버티기'란 언어유희에 불과해진다. 갑질의 다원성이 두드러지는 상황에서, 또는 미셀 푸코의 말마따나 권력과의 내부적이며 직접적인 전투가 불균형한 현실에서 "그래도 버티라"는 기성의 조언은 습속된 통제행태의 무의식적 정당화이자 무책임한 회피일 뿐이다. 철저하게 지배적인 물신주의, 권력의 끈질긴 독주, 이기와 세속적 욕망에 자리를 내어준 순수와 정의에 관한 의문 속에서 이제 갓 미술계에 발을 담근 작가들이 어떻게 버틸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우린 버티기 이상의 무엇을 봐야 할까. 다른 장에서도 누누이 강조한 것이지만 행동하는 연대와 미술주체로서의 자긍심을 통한 패러다임의 요청이 필수적이다. 이는 강제성을 근간으로 영향력을 잠재하면서도 그것이 합당하다는 이념을 덧씌워 가치판단을 무력화하는 일련의 해타한 것들로부터의 저항을 의미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는 을이다"를 되뇌며 자책을 겸한 비릿함에 스스로 관대해서는 곤란하다. 예술은 역사상 가장 특별한 가치였다는 것, 지금 그 일부를 수행하고 있다는 자존감만이 나를 을로부터 해방시킨다.

※홍경한은 미술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다. 미술전문지인 월간 '미술세계' 편집장, 월간 '퍼블릭아트' 편집장, 월간 '경향아티클' 편집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비평과 강의, 방송과 집필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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