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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영의 명화 에세이] 걸음이 선물한 세상-아르히프 쿠인지

도보여행을 좋아했던 러시아의 화가 아르히프 쿠인지(Arkhip Kuindzhi/1842-1910)가 남긴 그림들은 하나 같이 내게 '걸음이 선물한 세상'이다. 차로 가면 보지 못하는 이야기들, 바삐 가면 보이지 않는 장면들을 준비된 선물처럼 꺼내준다.

그림1-아르히프 쿠인지/The Sea. The Crimea/1908년



구두 수선공이었던 쿠인지의 아버지는 그가 여섯 살이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그는 힘든 가정형편 속에서도 화가의 꿈을 잃지 않았다. 열여덟에 처음으로 생계활동을 한 그의 직업은 사진관에서 교정을 보는 일이었다. 그렇게 차곡차곡 돈을 모아 그도 사진관을 차린다. 하지만 사진관에 그의 꿈을 가두어 놓기에는 그는 화가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너무 컸다. 그는 자신이 살았던 타칸로크를 떠나 명망 높은 미술학교가 있는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간다. 하지만 체계적으로 미술을 배워본 적이 없었기에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학교에 도전하지만 연속 두 번이나 낙방한다. 동굴에서도 한 줄기 빛은 들어오듯 그는 다행히 청강생의 자격으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미술공부를 마친 그는 러시아 전역과 서유럽을 여행하며 대가들의 작품을 공부한다. 여행길에 그린 그의 풍경화는 그만의 가진 온화한 느낌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가 그린 풍경화에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색과 빛의 만남이 있다. 러시아라는 나라가 지닌 혹독한 기후 속에는 이렇게 청명한 자연도 포함되어있었다.

그림2-아르히프 쿠인지/A Birch Grove/1901년



도시에서 지낼 때는 있고 있던 걸음들이 여행지에 가면 살아난다. 걸을 때 마다 목적지가 바뀌고,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더 많은 것들을 보는 것이 여행이다. 이것이 일상에서보다 여행길에 우리가 걸음을 더 사랑하게 되는 이유다. 나에게 남해여행이 그랬고, 나에게 제주여행이 늘 그러하며, 나에게 유럽여행이 그랬다. 남해여행은 다랭이 논을 따라 걸었고, 제주여행은 바다를 따라 한참을 걸었으며, 유럽여행은 돌바닥과 발바닥이 입맞춤하듯 걸었다.

그의 풍경화는 여백이 많아 완성이자 미완성과 같은 공간이다. 이 공간에 무엇을 더 그려 넣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지만 아무 것도 그려 넣지 않아도 이미 가득하다.

19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미술의 대가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는 '화가에게 풍경화는 철학수업을 받는 것과도 같은 과정'이라고 했다. 풍경화는 인물화와는 다르게 심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움직이지 않는 정물화와도 비슷하지만 풍경화는 생명이 있기에 다르다.

풍경화 속 주인공들은 생명을 지녔지만 늘 그 자리에 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짓밟히면 밟히는 대로 자리를 지킨다. 풍경은 바람이나 빗방울이, 파도나 사람이, 그리고 계절이 움직여야 변한다. 자기가 욕심내서 먼저 앞서 나가려고 하지 않고, 너로 인해 바뀐 내 모습이 싫다고 투정부리지 않는다. 그리고 늘 원래 돌아가야 할 풍경으로, 원래의 계절로 다시 돌아간다. 그것이 소멸이건 생성이건 자연이 하자는 대로 한다. 쿠인지의 풍경화는 앵그르의 말대로라면 우리에게 사색을 할 기회를 주는 철학수업이 맞다.

1892년 쿠인지는 자신이 공부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교수가 되지만 1897년 정부에 항의하는 학생들을 보호하려다 박탈당한다. 그리고 마흔 살이 되면서 모든 전시를 중단한다. 그때부터 30년간 조용히 그림을 그리며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과 땅을 기부하여 젊은 화가 지망생들을 위한 장학금 단체를 만든다. 그는 처음부터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이 얻은 재산과 명성을 다시 돌려놓는다. 그가 평생을 그린 풍경들이 늘 제자리로 돌아갔던 것처럼 그도 그랬다. 훗날 제자들은 그의 이름을 딴 '쿠인지 예술가 협회'를 만든다.

러시아의 음유시인으로 불리는 그의 그림들은 걸음이 선물하는 세상들로부터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우는지 넌지시 알려준다. 걸음으로 완성된 그의 풍경화는 나에게는 언제나 더할 나위 없는 한 권의 철학책이다.

그림3-아르히프 쿠인지/Moonlight Night on the Dnieper /1880년



이소영(소통하는 그림연구소-빅피쉬 대표/bbigsso@naver.com/'출근길 명화 한 점' '엄마로 다시 태어나는 시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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